2024년 7월 2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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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 해제(필자와 독자) ... 정양모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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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군 [ahyin70u] 쪽지 캡슐

2021-06-03 ㅣ No.147321

마르코복음 해제

 

필자

네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작품만 내놓았다. 그들은 작품을 중요시했을 뿐 필명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가짜 복음서를 배격하고 참 복음서를 옹호할 필요성과 복음서들을 서로 구별할 필요성이 생겨 비로소 필자를 거론하게 되었다. 누가 우리 복음서를 집필했는지 처음으로 밝힌 사람은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히에라포리스의 주교 파피아스였다. 그는 130년경에 사망했는데 평소에 요한 원로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 마르코는 베드로의 통역이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가르친 것을 기억나는 대로 충실히 기록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요한 마르코란 인물이 열 번 나오는데 요한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이다. 그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 살았으며 그 집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곤 했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를 안티오키아로 데려다가 45~49년경의 1차 전도여행을 함께 했는데 마르코는 도중에 전도를 그만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다. 이에 바오로가 그를 못마땅히 여긴 나머지 50~52년경의 2차 전도여행 때 다시 채용하지 않자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섬으로 가서 전도했다.

 

그러나 53~58년경의 3차 전도여행 때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감옥에 갇혀있을 때 마르코는 바오로 곁에 있었다. 그런가하면 바오로가 순교한 다음 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쓴 2대모 4.11에서는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마르코를 데려오도록 부탁한 적이 있었다 한다, 끝으로 70~100년 사이에 로마에서 집필된 1베드5,13에서는 마르코가 베드로의 일행으로 로마에 있었다 한다.

 

파피아스가 전하는 말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말들을 근거로 바오로의 협조자로 베드로의 통역이던 마르코가 우리 복음서를 집필했다는 통설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복음서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필자는 바오로나 베드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다. 마르코 복음에는 바오로 특유의 낱말. 소재. 사상이 거의 없다. 마르코복음에 수록된 예수의 말씀은 50년대 아니면 60년대에 편찬된 예수 어록의 말씀보다 많이 변질되었다,

 

따라서 베드로가 전한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마르코복음에 수록된 치유이적사화나 구마이적사화, 논쟁사화나 대담사화 역시 목격자 베드로가 바로 전한 이야기라 할 수 없다. 사실 그 사화들은 대부분 그리스 사화 양식을 미리 엮어져 있는데, 이는 오랜 전승과정을 거쳐 가능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편의상 마르코가 필자였다고 할 뿐이고 사실은 누가 우리 복음서를 집필했는지 밝힐 수 없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복음서를 눈여겨보면 복음사가의 됨됨이는 더러 알 수 있다. 다음 항목에서 자세히 거론하겠거니와 그가 히브리어와 아람어 그리고 유다인들의 풍습을 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복음사가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집필했을뿐더러 이방인의 풍습까지 아는 것으로 미루어 복음사가는 유다계 해외 문물을 익힌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도량이 넓은 인물인지라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온 인류의 구원을 부르짖었다. 온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음을 믿어 다함께 기도할 것이라 했다. 한걸은 더 나아가 유다인들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복음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시로페니키아 부인과 로마군 백부장을 신앙인의 본보기로 내세우기도 했다.

 

독자

마르코 복음사가는 명백히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복음서를 집필했다. 그러기에 그가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수록한 경우에는 거의 언제나 그리스어로 번역해 놓았다. 또한 이방인들에게는 생소한 유다인들의 관습을 풀이해 주었다.

복음사가는 이방인들의 생활상을 참작하기도 했다. 예컨대, 로마인들의 관습을 따라 밤을 사등분하고 그리스 동전을 로마 동전으로 환산하며 아내에게도 이혼할 권리를 인정한 로마-그리스 법률을 거론했다.

복음사가는 또한 시로페니키아 부인과 로마군 백부장을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귀감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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