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신앙상담 신앙상담 게시판은 비공개 게시판으로 닉네임을 사용실 수 있습니다. 댓글의 경우는 실명이 표기됩니다.

q 잠시 횡설 수설하겠습니다^-^

인쇄

사랑과영혼 [61.106.109.*]

2006-03-03 ㅣ No.3984

 

   † 찬미예수, 반갑습니다 형제님

 

   저는 서울그레고리오성가단의 총무 하경호 도민고라고 합니다. 형제님의 글 되새기며 잘 보았습니다. 형제님과 같이 저 또한 동적인 기도보다 정적인 선율등에 더 애착심을 갖는 영적인 찌꺼기가 남아있기에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이을까 합니다.

 

아마도 형제님이나 저나 마찬가지로 보다 큰 맥락에서 '가치 우선주의'와 '사랑 우선주의'의 비유만큼이나 단순하면서도 연쇄 파급적으로 어려울 수 있는 문제성에 대하여 저의 미천한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이미 밝히고 있지만 영광스럽게도 성령기도회 음악부 봉사도 경험하였고, 또한 같은 성령쇄신운동권이라 할 수 있는 꾸르실료(신설본당 부간사직 : 당시는 신앙 절정기로서 교구 본부에서 권면하는 모든 서류를 2년간, 단 한글자도 빠뜨리지 않는 상태에서 본당 꾸르실리스따에게 전달 할 수 있었슴)를 경험한 자로써 정작 성령세미나를 아직도 수료하지 못하였기에 결정적 결격사유로 해당 음악 봉사를 그만 두기도 하였는데, 아무튼 형제님과 비슷한 맥락의 분심으로써 성령 기도회팀이나 꾸르실리스따들의 상호간의 저마다의 애착심을 탈피해야 하는것은 같은 기독교(그리스도교) 신자로써 가톨릭(보편성)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대항, 또는 응대하는 자)의 계속된 일치 운동으로도 필요한 성령기도회만큼이나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시는 예수님의 도구들의 신원과 사명을 묵상하게 만들 것입니다. 더불어 하느님께서 형제님께도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으니 다만 주의 평화 가운데에서 묵상론을 잇도록 합시다.

 

당시의 성령기도회에서 노래하던 곡은 제가 환일고등학교(장로교 재단)에서 가수 임지훈 군과 동기 동문으로써 소풍때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노래하던 추억도 있었습니다만, 이때에 경험으로 말미암아 개신교의 찬송가가 상당수 가톨릭 성령기도회에서도 불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또한 이미 사후 복권된 마르틴 루터 신부가 당시의 교계제도를 비판하며 스스로 파계 행위를 하면서 오늘날의 장로교등의 분파를 형성한 문제를 우리가 다시 일치하여 나가자는 취지이기에 형제님도 그러한 분심의 여정도 겪으시리라 믿어봅니다.

 

성령기도회 내에서 장차 만나실 기회가 생기시겠지만 이중 사탄이 듣지 못하는 이상한 언어로 노래하듯 바치는 방언기도(심령기도)라는 것도 있는데, 이 심령 찬미가를 바칠 때 역시,  하느님 사랑에 감복되거나, 상대적으로 자신을 수월하게 버릴 수 있는 부러운 분들은 그 빛의 안수등에 쉽게 스러지는 현상들을 보는데, 이 역시 받아들임=판단정지=화해일치라는 어려운 은사의 일환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음악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그레고리오 송가의 평화로운 창출 과정도 억측(?)컨데 우리안의 깊은 나이신 주님의 명을 받들어 소리(성 요한)로서 봉헌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방언기도와 같은 그러한 음정등이 붙지 않았겠느냐 생각을 해보며, 아무튼 당시 하얀 수염과 함께 TV 연속극의 임꺽정 배우와 비슷하게 생기셨던 아오스딩 지도 신부님께서 강론하여 주시기를 방언 기도도 마음속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욕처럼 빠져 나올테고, 정화된 사람들은 천사의 선율처럼 흘러 나올것이라 지적해 주신점을 상기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다시 한번, 이곳에서 평화방송 FM의 새벽 5시부터 몇년전부터 한결같이 이어지는 '기쁜소식, 밝은 세상'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새소리와 함께 열리는 아침기도, 무반주의 인사맨트, 금주의 시작성가, 은은한 그레고리오 성가 반주와 함께 이어지는 자비송, 성무일도(독서기도, 찬미가), 오늘의 독서와 함께 묵상 나누기, 화답송 이후 역시 이어지는 묵상음악, 다시 그레고리오 성가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성무일도(아침기도, 찬미가), 알렐루야, 복음나눔, 관련 묵상 나눔/음악, 오늘도 함께 하소서(백뮤직 : 생활성가, 또는 건전가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부모를 위한 기도등으로 어찌 이 아나운서는 도무지 분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어조로 한결같이 이어올 수 있을까?란 탄복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저 도민고가 8,90년대가 막 교체되는 싯점에 꼬박 연중 300일 이상을 로사라는 같은 냉담교우 집앞을 지나야 했던 싯점, 저에게 실 체험과도 같은, 더불어 세상속에서는 그 내면의 고독보다는 유흥가등에서도 함께 흥겨운 음악으로 병행되고 있는 당시의 히트가요 유수일씨의 '아파트'라는 노래가 생성되었지만, 저역시 이러한 연유등으로 형제님과 비슷한 가운데 조용한 곡을 선호하는 습성이 남아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다만 작은 차이가 있다면 그때의 외사랑이라는 터널이 로사 자매의 불꺼진 아파트 창 앞 밴취에서 담배 한대 물던 시절이 거의 매일 이어졌기에, 이로써 이 도민고가 유아영세 냉담자로써 매우 참기 힘든 고독의 여정이었기에 죽어도 신자의 의무인 주일 미사를 궐할 수 없는 특전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는데, 형제님같은 경우는 뜸이 완만하게 이루어지는 은사로써 역시 좋은 은총으로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형제님과 비숫하다 할 수 있는 저는 미사 때에도 오직 예수님 한분만을 찾으려는 열정같은 것으로 이어져 때때로 교우들의 구둣소리, 지각하시는 교우들에 대한 안타까움등 그 분심이 끊이지 않는 업보같은 것을 간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형제님과 유사한 경우처럼 본당에서 맘에 안드는 신부님 때문에, 형제 자매들 때문에, 전례가 아닌 제도 때문에 분심을 사고 떠나는 형제들은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기도 합니다.

 

더우기 당시 로사 자매를 외사랑(혼자 좋아하는 것 만방에 알리는 형, 짝사랑은 남한테도 알리지 않는 형)하는 냉담 여정상의 유일한 친구가 이어폰으로 들리던 대중 가요였기에, 더우기 당시의 해바라기의 가사(화살)에 내가 과녁을 그리는 습성같은 것이 생겼는데, 이는 그리스도 은사중 일부로서 백발 백중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때의 냉담종료로 오늘날에 이르러 현재의 절두산 순례 성지에서 주일 미사곡을 솔로로 봉송하게 된 것도 인연이요, 언제 형제님도 기회가 되신다면, 왜 매주마다 바뀌는 순례자들이 단순히 노래가 좋아 모인 일반 성가대원들보다 훨씬 더 자신감있게 발성하고 있는지도 묵상할 수 있을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를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며. 작게는 초대 순교자들의 희생과 모범의 숨결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며 우리의 죽어가는 침묵의 부활을 소망하는 취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의지라면 형제님도 곧 꿈속에서조차 천사들과 하늘을 순례하는 꿈이 끊이질 않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고, 그런것 때문에 성당을 떠난다고 해서 고통이 멈추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쉽고 편안함에 더 젖기 쉬울 뿐이지요. 그런데 진정한 쉽고 편안함이 아닌, 세상속 유흥 물결속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가 난무하는데 과연 그 구원을 어떻게 받으시려고 그리 끌려가시는지요? 인간의 깨달음 종파로 가시렵니까?

 

그런가 하면 스스로에 대한 절망감보다 백배, 천배 어려운 것이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 우리들의 어둠으로써 하느님을 첫자리로 모시지 못하는 돈에 대한 우상화, 이러한 잔가지형 애착심등에 젖어 그것을 좋은말(?)로 설득시켜야 하는 애환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형제님도 결국은 뭐니 뭐니해도 세상속에서 가장 평화로운 그것은 주님품이요, 이러한 여정으로 우리가 한분이시며 삼위이신 그분의 그것을 기도.공부, 성사,봉사,공동체 생활의 조화를 위하여 조각내어야 함을 바라보아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아무튼 저는 오늘도 꿈이 주님안에서의 자랑거리인 성사생활등의 이러한 그리스도 다섯 상처를 묵상하는 여정을 쫓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결정적 실패의 원인이 형제님의 그것과 같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의 주님 말씀을 가슴으로 연결짖지 못하였기에, 그저 신기루를 찾는 사막에서의 감흥 위주였기에 감히 형제님의 그것과 유사하지 않았겠나 하는 마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형제님도 과거의 우리처럼, 더 나아가 초대 순교자들의 그것처럼, 그리고 '기쁜소식, 밝은세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봉헌하는 성령발의 그 형제(이 아나운서 형제가 땅에서 칭찬 받아, 하늘에서 상대적으로 못 받을까봐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처럼 성당으로 돌아오시길 권면합니다.

 

이제 사순절이 시작된지 3일째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순교하기 전의 그 모습처럼 부끄러움 없이 교회의 불만섞인 제도를 피력해 주신 형제님의 용기를 찬미 찬양드립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당은 하늘의 배요, 사순 기간동안 내집의 화장실 불은 열(?)나게 끄면서 우리 자신속의 성당 화장실 불에 무관심 했던 교형, 자매의 그것처럼, 또한 마음의 평화를 원타가 이타적인 사랑의 즐거움 맛들이기 문턱에서 낙오된 형제들의 그 경우처럼 어디론가 걸려 넘어진 형제들이 적지 않기에, 그래서 오늘도 미사후 주보등을 흘리고 가는 교우들이 비일 비재하고 그 뒷치닥거리는 늘 말없는 성직자 한분이 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그러한 실수를 반복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감히 형제님의 그러한 분심도 하느님이 형제님을 더욱 큰 몫으로 쓰시고자 허락하신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족 공동체의 묵주기도, 아침복음, 묵상, 삼종기도, 저녁기도 및 양심성찰, 미사, 영성체, 성체조배, 십자가의 길, 희생등을 잘 못하는, 비록 쉽고 편안함에 젖은 가톨릭 신자일지라도, 이 사순시기를 맞아 조금이나마 12제자가 모두 잠든 겟세마니에서 다가올 엄청난 몸과 피의 고통을 홀로 겪으시는 예수님의 고통을 새롭게 보속하고 나누자는 취지에서 형제님도 모쪼록 단 한번의 미사 참례를 다시 바쳐주시기를 권고합니다.

 

미사는 보는 것이 아니고 참례하는 것이기에 그렇치 못한 우리가 통회하고 보속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정중동도 좋치만 동중정까지 끊임없이 봉헌함으로써 진화하는 크로스(십자가)체크를 즐겨 나눔으로써 마침내 상따(거룩한)크로스 할아버지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주제 넘고 염치없는 말인줄 알면서 시끄럽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부연컨데, 어느분이 그저 일용할 양식이면 흡족할테니 저의 성가(전국 아마 성악 일등집안 달란트), 그림(국민대 시각디자인 81학번), 낙서의 세가지를 한가지로 봉헌할 수 있는 선교 복음 일자리로 될 수 있도록 빽좀 써주세요. 부탁 입니다. 단, 연줄과 티끌만큼의 부조리형도 철저하게 사양코저 하는 것이 저의 바램이니 참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멘.

 

좋은아침 351-4589 Domingo 올림.



314 0댓글쓰기

신고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