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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흔들리는 신자를 붙잡아주고 싶은데 누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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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222.110.203.*]

2013-02-01 ㅣ No.10081

† 찬미예수

   부족한 필자의 견해로는 하느님과 재물을 우리가 동시에 섬길 수 없기에 사촌동생이 거기에 걸린 것 같습니다. 성당에도 다단계가 많이 침투해 있는 것은 신앙을 수단으로 삼으려는 부족한 우리네 심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신부님은 묵묵히 기도를 권고했다 보여집니다. 기도안에 성경과 성전(성스러운 전례, 전승)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천주교는 성경과 성전을 믿습니다.

신앙을 수단으로 삼건 평화의 도구로 삼건 하느님은 이때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큰 선물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네 인생의 길이는 모르지만 그 넓이와 깊이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흔치 않은 절대사랑을 허락하여 주시기에 우리의 기도는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선교의 목적은 단순 세례로서의 신자 수 증가를 위한 실적위주가 아니고 세상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친교에 참여하게 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기에 때때로 알쏭달쏭 하기도 하고 난해한 벽에 봉착하기도 할 것입니다. 더욱이 가족이나 친지가 떠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임의 경우는 떠난다기보다 파견이라는 생각도 더하실 필요가 있다고 보여 집니다. 말씀을 우선 지향하는 개신교와 전례를 우선 지향하는 천주교의 조화를 위해 그 분도 언젠가 깨우칠 일인데 무조건 내 종교가 아닌 종파가 최고다. 라는 생각은 역효과를 발할 수 있으니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으로 보여 집니다.

그 생각조차 주님 안에 내려놓고 침묵을 먼저 즐기십시오. 성체조배도 좋고 개신교가 영위하기 힘든 성사생활로 이끌어준 그분의 조력도 또한 하느님 사랑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은 생명의 은총(상존은총), 도움의 은총(조력은총)이 있겠는데 형제님이 그동안 쉬셨기에 이러한 은사들에 다시 힘을 얻는 과정일 것입니다.

모든 개신교의 뿌리는 천주교이기에 예수님을 믿는 교회는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개신교 형제들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AD 33년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천주교가 있고 AD 1530년 독일사람 루터가 세운 루터교가 있으며 AD 1534년 영국 왕 헨리 8세가 세운 성공회가 있는데 침례교는 감리교와 함께의 성공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입니다. 개신교의 개신교인 셈이며 우리가 여행을 떠난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하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다만 형제님이 우려하는 것은 필자도 공감하며 계속하여 주님을 초대하며 글을 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AD 1560년 프랑스 사람 칼빈이 세운 장로교 또한 믿음대상은 천주교를 세우신 예수님입니다. 개신교인 입장에선 천주교라는 글자가 마음에 걸릴 수도 있겠군요. 이것은 하느님(‘하늘님’에서 진화된 발음 언어)을 수사인 하나에 임을 붙이는 문법적으로도 잘못된 하나님과 다른 의미이며 그 속뜻은 일치의 열쇠가 담겨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개종한 그 형제님처럼 뭔가 자유 의지속에 섞갈림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부활이나 윤회나 같은 것이지 뭐~라는 자기 합리화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이야기로서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사회 정의에도 앞장서게 될 때 다시 섞갈림이 따르겠으나 두려워하지 않고 파견되는 특전으로서 이 나라 전반적으로 물질주의, 예로써 하느님과 돈의 양다리를 걸친 사람들과 상인들이 설정하는 고급 차량 외양 등으로 신분을 매기는 풍조도 일종의 미신행위와 관련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찬찬히 공부하시면서 그분과 대화 나누시되 이 역시 준성사 기도로서 나눌 필요성이 있겠습니다.
 
빛이 환하면 어둠의 그림자도 진하기에 우리는 더욱 바보처럼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세가 중요하겠습니다. 결국 신부님이 권고하신 기도 속에는 우리가 자주 미사를 참례하지 못하고 보기에 개종한 분들 경우를 보더라도 고해성사에서 감동을 받지 못하여 그렇다고들 하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 사유 때문이라 보여집니다. 예로서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희생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보노라면 이 분들은 일반인들이 보는 그것보다 깊이 참례해야 하기에 결국 정의에 대한 감동과 기쁨의 선물을 모를 리 없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침묵 봉쇄 수도원에서 평생 죽어야 관속으로부터 세상 구경을 하는 것과 달리 세속인들은 복잡한 세상에서 부유하기도 하겠지요. 이 또한 보다 범위를 크게 보시고 일치 지향하는 원동력을 추구하시면 되겠습니다.

얘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지려 하니 다시 조율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을 붙잡고 싶은데 나서기가 민망하다고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형제들은 지하철에서도 설교 등 잘 나서지요? 그래서 개신교 형제들이 우리 천주교 복음 전구 및 신자 증가를 대신 해결해 주는 현상도 적지 않은데 이 역시 음양의 조화일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의 이 경우는 열사람 받고 한사람 보내주는 포로교환 같기도 하겠군요. 개신교 신자들은 예수님 없는 십자가를 믿기에 그렇습니다.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 상당수들은 십자가 없는 예수님이 많은데 이는 그만큼 큰 집이라 그렇기도 할 것입니다. 얌전하고 선행을 잘 드러내지 않으니 일반인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는 오늘날 정치 문제에 있어서도 바라바와 예수님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기에 우리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 중 최고의 압권은 미사이고 성체성사인데 이 섞갈림의 은사와 함께 형제님은 그분의 희생을 통하여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는 아이러니를 고백했다 보여집니다. 필자도 사실은 날라리 신자입니다. 어떤 신부님은 대명을 날라리라 정해놓고 잘 날아다니시는 것 같더군요. 신앙은 이처럼 자유롭답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도 없고 다만 그 사랑과 관심을 잃지 말고 보다 열린 마음으로 즐겨 대화하시는 것이 필요할 듯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 않고 나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의무와 권리로서 때로는 해치움으로서 미사를 참례하지 못하고 보는 것도 하나의 과정일 것입니다. 요는 우리 마음에 산재하여 있는 거룩함과 경건함으로 떠나는 과정이기에 세상 사람들 또한 보편 심리로 여행을 갈망함 또한 오늘의 사건이 한알의 밀알이 기쁘게 썩음으로써 커다란 복음의 열매화 되실 예감도 드는군요. 우리는 이처럼 상대를 통해 나를 돌아보기도 합니다. 회개란 돌아본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런 것을 조건 없이 주님께 때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보여집니다. 필자도 천주교 모태신앙입니다만 가끔 개신교적으로 남잔데 말이 많을 때가 많다.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적을 때는 또 무지 적어집니다. 말을 할 때 입김조차 깨물지 않는 평화의 언어를 즐기기도 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의 특전이지요. 일단 형제님도 열화와 같은 성령 은사가 주어진 듯하니 급할수록 돌아가는 자세로 시나브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화해에 대해서도 병행하여 주시고 아무래도 천주교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에 휩 쌓이기 쉬운 개신교 형제들을 함께 기억하며 진심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안의 한 핏줄로 여길 수 있다면 그 기도는 성공적으로 이어질 것이라 봅니다.

서론이 여전히 길었고 본론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잇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은 가톨릭 교리신학원 입학 최종 면접 및 필기시험이 있거든요. 함께 기도 부탁드립니다.^^'


2013. 1. 3. 海棠 하경호 Domi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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