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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9 ㅣ No.10154

종교학이나 종교다원주의를 공부한 바는 없으나 그냥 생각하는대로 답변을 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을 유일신이라고 하는 말을 "세상의 신은 오직 하느님 밖에 없다"가 아니라
"우리가 진실되게 믿어야 할 신은 하느님 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구약성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벌 때에 가나안 땅에 이미 존재했던 많은 신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성경에서는 그 신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신" 혹은 "다른 신들"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는 그것들을 "우상"으로 몰아부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민족과 뒤섞여서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서로 각 민족의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됩니다. 분명 다른 민족들도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민족도 다른 신들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단지 어느 쪽이 더 강한가 하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더 강한 것으로 표현됩니다.
사무엘 6장 5절에도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이 땅을 파괴하고 있는 ~ 모양을 만들어,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아마도 그가 여러분에게서, 그리고 여러분의 신들과 땅에서 자기 손을 거둘 것입니다."

천주교의 교리에서 무속신앙을 마귀로 표현한다고 하셨는데,
마귀는 악령입니다. 그리스도교에는 성령이 있지요. 악령은 성령과 대치되는 개념입니다.
성령은 누구입니까? 성령은 하느님입니다. 즉 신입니다. 그렇다면 악령은 누굴까요? 악령 또한 신입니다.
단 우리가 믿어야 하는 신은 아닙니다. 신적 존재로서 인정할 수는 있으나 신뢰가 안 가는 신,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신, 또한 그들의 계시가 사람들을 현혹시킬 때에 우리는 그들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마귀의 존재는 그리스도교의 악령과 무속신앙의 미신, 또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른 민족의 신들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든간에 그것들은 우리가 하느님을 믿지 못하도록 유도하고, 우리의 하느님 신앙을 방해합니다. 또한 그들은 늘 주는게 있으면 반드시 그들 자신이 챙기는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믿어야 할 신은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모습은 기복신앙입니다.
이것이 뿌리가 되어 그리스도교나 불교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인류의 역사 안에서 볼 때에, 최초의 종교는 그 이전에 뭐가 있었지만 어쨌건 무속신앙입니다.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속신앙이 흥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후에 불교가 이 땅에 보급되었고, 불교는 무속을 흡수해서 말살시키려 했으나 완전히 흡수하지도 못했고, 완전히 말살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유교가 들어왔지만 유교 또한 그 전에 있었던 무속과 불교를 완전히 말살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후 그리스도교는 또한 무속, 불교, 유교를 완전히 말살시키지 못했지요. 현재도 무속, 불교, 유교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오래된 순으로 불교 안에도 무속이 있고, 유교 안에도 불교까지가 다 있고, 그리스도교 안에도 유교까지가 다 있습니다.

형식상으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동일한 전례로 하느님을 예배하지만, 그 안에 뿌리내려진 민족적 심성 안에 그 이전의 종교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어느 나라나 가톨릭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가톨릭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필리핀같은 경우에는 성모신심만 유독 강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입니다. 일본은 불교와 신도를 넘나드는 신앙이 강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로 정착되는 것이 매우 까다로운 일입니다.
가톨릭에서는 형식에 확실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생미사나 축복예식 같은 것들은 원천적으로 기복신앙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점집에 가 보셨으면 아시겠습니다만, 무당들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네 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가톨릭의 축복은 단지 복을 빌어 주는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를 빌어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오 복음 10장 13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복신앙적으로 보자면, 평화를 빌어준다면, 복을 빌어준다면 그 복은, 그 평화는 그 집에 반드시 내려야 합니다. 안 빌어준다면 모를까 다시 돌아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리고 공짜로 복을 빌어주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대신 뭔가를 받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복은 복을 받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가 해야 할 보상입니다. 이 땅의 특이한 기복신앙은 분명 문제가 됩니다만, 복을 기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사람이 불행해지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어떤 종교든 당연히 인간의 행복을 바랍니다.
단지 그 모양새가 특이한 이 땅의 무속의 영향으로 특히 개신교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더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만, 가톨릭은 그마나 정해진 룰이 확실한 편이라서 괜찮습니다. 물론 그것도 형식은 그렇지만 신자들이 받는 것은 좀 다릅니다. 고대로부터 전래되어 온 무속이 포함된 종교적 심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들을 깨기 위해서 더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지식이 없으면 가이드 라인을 잡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깊은 신앙을 가졌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기도하는 대상이 과연 모두가 바라보는 하느님인지 그 사람 마음 속에만 자리잡고 있는 우상인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쨌건 이 정도 일단락 해 두고 넘어갑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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