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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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님)2024년 6월 15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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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6-15 ㅣ No.173321

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19,19-21 

 

그 무렵 엘리야는 산에서 내려와 

19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20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오늘은 네 번째 새로운 의로움으로, ‘맹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거나, 그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서 ‘맹세’라는 것을 합니다.

우리는 에사오가 성급한 ‘맹세’로 야곱에게 장자의 상속권을 팔아넘긴 이야기(창세 25,33), 헤로데의 경솔한 ‘맹세’로 한갓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이 목숨을 잃은 이야기(마르 6,17-19), 베드로가 추궁을 벗어나기 위해 맹세까지 하면서 스승을 모른다고 배신한 이야기(마르 14,71) 등을 압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맹세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계약 체결 때(신명 4,31;7,8), 약속 이행의 보장을 말씀하실 때(창세 22,16;26,3), 심판 예고 때(민수 14,21;아모 4,2;6,8),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실 때(에제 20,3;33,11)에 그러하십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대개는 “나는 살아있는 자로다”라는 표현이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유일한 보장은 하느님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신명 6,13;10,20).

그리고 <레위기>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위 19,12).

한편 사람들끼리는 ‘맹세’하여 계약을 체결하고 약속이나 결심이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법정의 심문에서나 예언자들의 예언에서 그 말의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하느님을 보증자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법정에서 증언할 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이는 거짓 맹세인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차차 시간이 가면서, 하찮은 일까지도 하느님을 끌어들여 자신의 목적을 위한 ‘이기적인 거짓 맹세’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1

심지어 피조물을 두고 맹세함으로써 우상숭배의 결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맹세’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그 주인이 아니기에, 하느님이나 하느님 것을 두고 맹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자일 뿐, 스스로가 부르심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사람들일 뿐, 하느님의 뜻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응답하여 따르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해야 할 뿐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정직함’(솔직함, 질실)이 요청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의 성실한 실행에 그 진실성의 여부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께 응답하고, 응답한 바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믿는 이에게는 ‘맹세’ 자체가 필요 없는 일입니다.”(힐라리우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의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말합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창세 12,5)

이를 두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 이리하여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로마 4,11-12)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음으로 ~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로마 5,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마태 5,37)

주님!

오늘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주인 행세하기를 멈추고, 당신 뜻에 응답하는 자 되게 하소서!

응답이 행동으로 진실되게 하소서!

제 말과 행동이 참되게 하시고,

“예” 할 것을 “아니요”라고 하지 않고,

“아니요” 할 것을 “예”라고 하지 않게 하소서.

제 자신이 진리인 양 내세우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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