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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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마태오 5, 33 -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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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승 [bona24] 쪽지 캡슐

2024-06-14 ㅣ No.173306

“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5,37)


삶에서 최소한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바꿀 마음을 먹어야 하고, 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인간은 습관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억누를 수 없는 강력한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바로 ‘아니요’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무언가 부정하고 거부한 듯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지만, 사실 이 말은 부정이나 거부와는 거리가 멉니다. 제 형의 손찌검처럼, 양성 초기엔 함께 사는 형제의 휘둘림으로 인해 저는 예전처럼 살아서는 이곳에서 내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내적 소리를 들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Alain은 「권력욕」에서, “생각하는 것은 아니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표현하기를, 아니요는 어떤 그 무엇이나 누군가와 차이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강력한 단어이며, 아니요는 불일치를 표시하는 말로, 실제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고 말했습니다. 다양한 권력 형태나 외부 압력 앞에서 아니요는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제시해 준다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표현한, ‘생각하는 것은 네라고 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라는 표현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마음에 새기며 살려고 다짐합니다. 알랭은 그래서 “잠든 자는 ‘네’라고 말하고, 깨어 있는 자는 ‘아니요’라며 고개를 내젓는다.”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부인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바꿀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예전에는 제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수도원 입회 후 어떤 사람 때문에 그리고 그가 저에게 한 폭력 때문에 저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해 왔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맥락, 즉 참과 거짓 혹은 옳음과 그름의 관점에서 ‘예와 아니오’와는 조금 다른 측면이겠지만, 아무튼 저는 이런 연유에서 어떤 문제 앞에서 ‘예’라는 말보다 ‘아니요’란 말을 더 자주 빈번하게 표현하며 살아온 편입니다. 무척 자기방어 기제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저를 표현할 때 저는 똥개라고 말합니다. 왜 똥개는 자주 큰 소리로 짖어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스스로가 힘이 약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반면 진돗개는 아무 때나 짖지 않습니다. 저는 겉으로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마음이 여리고 약한 사람입니다. 강한 척할 뿐이지.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처럼 그렇게 저를 방어하기 위해 살아왔지만 이젠 더 이상 저를 방어하지 않아도 되기에 요즘은 마음 가는 대로 살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회색 인간이 된다는 표현이 있더군요. 

젊은 날에는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라고 생각했죠. 나이 들어가면서 회색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쉬운 표현으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신 분이 바로 돌아가신 박도세 유스티노 신부님이십니다. 그런 신부님의 표현이 예전에 제 성격이나 성향에 맞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이젠 받아들입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처럼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면서 침묵하며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흑백이 전부가 아니듯이, 흑백만이 진실이 아니더군요. 과거엔 남보다 피곤한 삶을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5,37)하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과 달리 아니오, 라고 말해 놓고서 예, 라고 변경하는 경우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진리나 정의 앞에서 우리 모두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욱 잘못한 권위자 앞에서는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아니요.’라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진정으로 나이 든 사람의 자세와 삶이라 봅니다. 예, 라고 해야 할 때 예, 라고 응답할 수 있고, 아니오, 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진리를 아는 사람이고 이미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제 삶 앞에 어떤 상황이라도 예할 것을 예하거나, 아니요할 것을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시119,36.29참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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