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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일기91/김강정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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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daegun011] 쪽지 캡슐

2001-07-16 ㅣ No.4112

               사제관 일기 91  

 

두어달의 작업 끝에 이루어놓은 자료들이 단 한번의 실수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놓은 제 인생 역작이었는데,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컴을 잘 다룬다는 분들도 고개를 저으며 물러갑니다.

두어 달을 밤새워 준비해 놓은 작업을 한 순간에 다 잃고 보니,

솔직한 말로 살기가 싫어졌습니다.

......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들은 하나같이 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것들뿐입니다

한번의 실수도 눈감아 주지 못하는 저 무정스러움이 너무나 밉습니다.

1을 두 번 더하면 반드시 2를 내놓고 마는 그 고집스러움.

한번 지우고 나면 다시는 기억에 올리지 못하는 아둔함.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 놓았다는 것들의 모습입니다.

...........

그러고 보면, 하느님의 솜씨는 보통이 넘으십니다.

조물을 만드실 제, 그런 멋없는 축은 하나도 만들어 놓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비록 계산에는 더디지만, 정에는 더욱 가깝고 친숙한 것들,

저마다 냄새를 지니게끔 만드신 연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들 속에는 도통 냄새라고는 맡을 수 없으니,

그 획일적이고 단순한 이기(利器)에 넌 저리가 날 뿐입니다.  

.........

앞으로 더욱 컴과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 방향뿐인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에 의해 내놓는 이 엄격한 질서가 싫습니다.

다소 엉성하고 부실하기는 해도,  

냄새가 없는 것들보다는 냄새를 지니는 것들을 더 가까이 여기며 살 겁니다  

그들은 적어도 한번의 실수를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들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

그러면서,

혹여, 제 삶도 컴을 닮아, 정 없이 메말라있지는 않는지도 생각해보겠습니다.

관용과 너그러움보다는,

한번의 실수에도 가차없이 칼을 드는 잔인함은 없는지도 여겨보겠습니다.

진실로 바라거니와,

사제이기에 앞서 한 인간이기에,

사제로서의 냄새 이전에 인간적인 살 냄새를 먼저 풍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느 사람 안에서 맡을 수 있는 그 냄새가 제게 없다면,

사제로서의 냄새도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인간적인 모습의 사제로 다가서고 싶을 뿐입니다.

사람 편에서 제 향기를 찾고,

그 편에서 제 냄새를 나눠드릴 수 있는,

그런 사제이고 싶습니다.

 

...........

사제의 마음치고는 너무나 옹졸하고 작기만 한 가슴.....

이 크기로 몇 해를 살아왔음에 비로소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을 엉터리라 부르셔도 더는 할 말이 없겠습니다.

스스로 점수를 매겨봐도 도저히 후히 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보다 더 넓은 마음으로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그런 모습을 찾을 때까지

스스로 엉터리 신부라 여기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노력도 많이 하겠습니다.

제 안에서만은 오늘의 컴과 같은 비정한 모습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천만번이라도 잊고, 용서해주고, 품어주는 사제의 마음,

바로 그 마음을 찾을 날, 비로소 참 사제소리를 들어도 좋겠습니다......

허나, 그 전까지는 영원히 엉터리 신부일 겁니다......

꼭 지금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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