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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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전임 교황 베네딕트 16세 명저, [나자렛 예수] 3장 하느님 나라의 복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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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67.182.215.*]

2014-07-05 ㅣ No.10657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의 공생활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4-15) 동시에 그는 이 말로 예수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가를 일러준다. 마태오 역시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벌이시는 활동을 이렇게 요약한다.“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마태 4,23 ; 9,35) 그러니까 이 두 복음사가는 예수의 설교를‘복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런데 복음이란 무엇인가?

최근에는 이 말을‘기쁜 소식’이라는 말로 번역한다. 퍽 좋은 표현이다. 그러나 이 말이 실제로 의도하는 큰 차원에 이르기까지는 거리가 참 멀다. 이 말은 로마제국 황제들이 쓰던 언어다. 로마 황제들은 스스로를 온 세상을 지배하고 구원하고 해방하는 구세주로 이해했는데, 황제들이 발송하는 전갈은 그 내용이 특별히 즐겁고 마음에 드는 것이든 아니든 모두‘복음’이라고 불렀다. 황제에게서 오는 소식이 아니라 세상을 좀 더 좋게 바꾸는 소식이라는 것이다.

복음사가들이 굳이 이 낱말을 골라 쓴 데에는 의도가 따로 있었다.(이 낱말이 그들이 저술한 기록의 독특한 문학형식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굳어진 것은 나중 일이다.) 신(神)으로 자처하던 황제들이 부당하게 주장하던 것이 예수의 복음에서는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권위 있는 메시지로 전해지는 이 전갈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요즘의 언어학적 용어로 말하면 복음은 단순한 정보언어만이 아니라 수행언어다. 단순한 통지나 전달이 아니라 행동이고, 세상에 들어와 세상을 구제하고 바꾸는 효과적인 힘이다. 마르코는‘하느님의 복음’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니까 황제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 말씀이 효과적인 행동의 말로 나타난다. 황제들이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그저 주장만 하던 것이 여기서는 실제로 일어났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세상의 참된 지배자가 행동에 나서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다.


‘복음’의 중심 내용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시간 안에 어떤 기한이 그러지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선물은 인간에게 응답을 요구한다. 곧 회개와 믿음이다. 이 통보의 중심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이며, 실제로 이 통보가 예수의 말씀과 활동의 중심을 이룬다. 간단한 통계자료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하느님 나라’라는 말은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모두 122번 나온다. 그중 99번이 공관복음서에 나온다. 그리고 이 가운데 90개 본문이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의 일부로 나온다. 요한 복음서와 나머지 다른 신약성경에서는 이 낱말이 이렇다 할 구실을 떠맡은 것이 없다. 따라서 부활 이전 예수의 설교에서 주축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이고, 반면에 부활 이후 사도들의 설교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실제 설교에서 멀어졌다는 뜻인가? 루돌프 불트만이 역사의 예수는 신약성경의 신학에서 차지할 자리가 없다고 한 말이 옳다는 말인가? 역사의 예수는 기껏해야 유다교의 한 스승으로 보아야 하며 그분이 신약성경에 없어서는 안 될 전제조건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분을 직접 신약성경의 일부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우리는 예수와 사도들 사이를 갈라놓는 엄청난 구렁이 있다는 견해의 또 다른 형태를 가톨릭계 근대주의자 알프레드 루아지에게서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정작 온다는 하느님 나라는 안 오고 교회가 왔다는 말을 남겨 유명해졌다. 이 말은 하나의 냉소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안타까워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느님 고유의 나라, 하느님이 몸소 변화시킨 새로운 세상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교회라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전혀 다른 것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 말인가? 그리스도교는 사도들의 설교로 교회라는 모습을 띠고 형성되었는데, 이 설교로 세워진 교회를 일러 과연〔하느님 나라에 대한〕기대를 채우지 못하고 전혀 다른 것으로 추락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주어(主語)가‘하느님 나라’에서 그리스도로 바뀌었다는 사실, 그래서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실제로는 약속의 파기이고 무언가 다른 것이 등장했다는 것을 뜻하는가?

모든 것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렸다. 설교의 내용은 설교하는 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분은 그저 소식을 전해 준 한낱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으며, 그래서 어떤 전갈을 대신 전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인가? 아니면 전갈을 전해 준 사람이 바로 전갈 자체인가? 이 물음에 비하면 교회에 대한 질문은 이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 근본적인 것은 하느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교회를 이해해야 하는지는 여기에 달렸다.

 

우리가 예수의 말씀에 깊이 파고들어가 그분이 알려주는 소식, 그분의 행동, 그분이 당하시는 고난을 이해하려 하기 전에 먼저 교회가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이‘나라’라는 말을 어떤 뜻으로 파악했는지 잠시 되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교부들은 이 말을 세 가지 차원으로 해석했다.

먼저 그리스도론적 차원이다. 오리게네스는 예수의 말씀들을 읽어보고 그분을 아우토바실레이아(autobasileia)라고 표현했다. 이는 예수 자신이 그 나라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그 나라다. 그 나라는 어떤 사물도 아니고 세상의 나라들처럼 지배영역도 아니다. 그 나라는 인격이다. 예수께서 그 나라다. 그러니‘하느님 나라’라는 말에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론이 숨어 있다. 그분은‘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는 방식을 통해 하느님이 그분 안에 몸소 현존하시면서 사람들 사이에 계시다는 것, 그분은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엄청난 사실로 사람들을 이끈다.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해석하는 둘째 차원은‘이상주의적’또는 신비적 해석이다. 이는 하느님 나라를 본질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방향의 이해도 오리게네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기도에 대한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하느님 나라의 오심을 비는 사람은 의심 없이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이 나라가 열매를 맺고 풍성해지기를 기도한다. 모든 거룩한 사람 안에서는 하느님이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주권,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기를 바란다면(그 나라가 우리 안에 있기를 바란다면) 죄가 언젠가는 죽고 말 우리 육신을 다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로마 6,12)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는 하느님이 마치 영적 낙원에서처럼 산책을 즐기실 수 있어야 하고(창세 3,8) 그분만이 홀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다스리셔야 한다.”(PG, 11, 495쪽 이하) 기본적인 사상은 분명하다.‘하느님 나라’는 지도상으로 어디엔가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같지 않다. 그 나라의 자리는 인간 내면이다. 하느님 나라는 거기서 성장하고 거기서부터 행동하는 힘을 발휘한다.

하느님 나라를 해석하는 셋째 차원은 교회론적 해석이다.

하느님 나라와 교회는, 방식은 여러 가지로 다를 수 있지만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엇비슷한 존재로 혼동되기도 한다.

내가 알기로 이 마지막 해석 방향은 무엇보다도 근대 가톨릭 신학에서 갈수록 정설로 통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인간의 내면을 지향하는 해석과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이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19세기는 물론이고 20세기 초 신학에서도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느님 나라라는 말을 자주 했다. 교회가 역사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개신교 계통의 신학에서는 계몽주의 사상이 성경해석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다주게 되었고 특히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해석은 곧바로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다.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돌프 폰 하르나크다. 그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당시 유다교와 비교하면서 그 메시지 안에 두 가지 혁명적 내용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유다교에서는 모든 것을 일정한 집단,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받은 민족에 집중시켜 해석하는 반면 예수의 메시지는 엄격한 의미로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면서 그 개인이 타고난 무한한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을 당신 가르침의 기본으로 삼았다.

하르나크가 둘째로 드는 유다교와 예수 사이의 대립은 근본적인 것이다. 유다교에서는 종교의식에 관한 것(사제직)이 지배적이었으나 예수는 반대로 이 종교의식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으며, 그의 메시지는 도덕성을 지향했다고 한다.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종교의식상의 정화나 성화가 아니라 인간 영혼이었다. 각 사람의 도덕적인 행동, 그가 실천에 옮기는 사랑의 업적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거나 거기서 쫓겨나거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의식과 도덕, 집단과 개인을 대립시키는 흐름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1930년부터는 가톨릭 성경주석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하르나크는 예수와 유다교를 대립시키면서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삼대 종단인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러시아 정교와 게르만 계통의 개신교를 결부시켰고 이 가운데 개신교가 예수의 메시지를 가장 순수하게 원상 복귀시켰다고 했다.

물론 개신교 안에는 이런 하르나크의 견해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각 개인이 개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약속의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받는 것이며 개인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윤리적인 공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는 오히려‘윤리 저 너머에’있으며 그것은 순수한 은혜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특히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나누신 식사에서 잘 나타난다.(Schmidt, GLNT,Ⅱ, 193쪽 이하 참조)

한때 시대를 휩쓸던 자유주의 신학은 제1차 세계대전과 그 뒤에 이어진 사상계의 근본적 변화로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이 변화는 훨씬 이전부터 예고되고 있었다. 첫 번째 신호는 요하네스 바이스의「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1892)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성경주석의 초기 연구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에 따르면 예수의 메시지는 철저하게 종말론적이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그분의 설교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으며 하느님의 새 세상, 바로 하느님의 다스림이 밀어닥치게 되었다는 설교였다고 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설교는 엄격한 의미로 세말(世末)에 밀어닥칠 하느님 나라의 설교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는 본문들도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이 방향으로 해석했다. 이런 본문을 예로 들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3-9), 겨자씨의 비유(4,30-32), 누룩의 비유(마태 13,33 ; 루카 13,20-21),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가 있는데 모두 성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의 의도는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갑자기, 단번에 지금과는 다른 것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말해 주려는 데 있다고 한다. 이는 명백히 본문을 잘 들으려 하기보다는 이론을 지나치게 앞세운 것이라고 하겠다.

종말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이 시각이 우리로서는 실감나지 않기 때문에 오늘을 사를 그리스도인을 위해 번역해 보려는 다양한 노력이 있었다. 예를 들어 불트만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으로 이를 시도했다. 실존을 살아가기 위해‘언제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르겐 몰트만은 에른스트 블로흐에 동조하면서‘희망의 신학’을 개발했는데 이 희망의 신학은 믿음을 미래를 구축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동참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는 동안 세속주의적인 신국사상(神國思想)이 광범위하게, 특히 가톨릭 신학계에서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 신국사상은 그리스도교와 종교와 역사 전반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전망을 펴고 이렇게 심도 깊은 변화를 통해 예수의 메시지를 다시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 사상이 흔히 말하는 바에 따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는 교회 중심 사상이 지배적이었으며 교회를 그리스도교의 중심으로 내세웠지만 그다음에 그리스도 중심 사상으로 넘어가 그리스도를 우주 전체의 중심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 아닌 것과 분리하는 교회가 되었고 그리스도도 그리스도인만의 차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중심 사상에서 신 중심 사상으로 한 단계 올라가 여러 종교가 연합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목표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할 것이 하느님 역시 종교와 종교 사이를 가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신국 중심 사상으로, 신국이라는 중심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메시지의 궁극적인 핵심이고 세계의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여정에서 인류의 적극적인 능력을 한데 뭉칠 수 있는 올바른 길이라고 한다.

간단히 말해 이‘나라’란 평화와 정의가 지배하고 피조물계를 보존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의미한다. 이‘나라’를 역사의 최후 목적으로 다시 세워놓아야 한다. 곧 모든 종교의 과제인‘나라’의 도래를 위해 다 같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종교들은 자기네 교유한 전통을 고수할 수 있고 각 종교마다 자기네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며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들은 각기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평화와 정의와 피조물계의 존중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이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예수의 메시지를 마침내 누구나 두루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종교들에게 개종하라고 선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예수의 말씀도 마침내 실천적인 내용을 얻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이‘나라’를 실현하는 일이 우리 모두의 공통 과제가 되어 머지않은 장래에 이를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흠칫 놀라게 된다. 정의가 무엇인지 과연 누가 말해 줄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과연 정의를 위해 보탬이 되고 이바지하게 되는가? 평화는 어떻게 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가? 자세히 살펴볼수록 이 모든 것은 현실적인 내용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상주의적인 잡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이 개념들에서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내용으로 저마다 자기네 편을 들어야 한다는 파당(派黨) 교조주의(敎條主義)를 슬그머니 전제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눈에 띈다. 이런 전망에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사라지고 인간만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종교적‘전통’을 존중한다는 말은 겉치레일 뿐이다. 사실 그들은 이 전통이 한 무더기의 습속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사람들에게 그냥 그대로 내맡겨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습관들은 이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신앙과 종교라는 것도 정치적 목적에 초점이 맞춰지고 세상을 건설하는 일만이 중요하다. 종교의 미래상을 이렇게 그린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시대가 다 지난 다음에나 가능한 예상이다. 그런데 이런 예상이 예수의 셋째 유혹과 흡사하여 걱정스럽다.

 

 

 

- 나자렛 예수 / 교황 베네딕토 16세 지음 / 성바오로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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