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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바로보기/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루가2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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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21 ㅣ No.147764

 

 

(공동번역성서) 2021. 6. 21. 성경바로보기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루가20,9-19)

9 그 때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 주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10 포도철이 되자 그는 포도원의 도조를 받아 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을 때려서 빈손으로 되돌려 보냈다. 11 주인은 다시 다른 종을 보냈는데 그들은 그 종도 때리며 모욕을 준 다음 빈손으로 돌려 보냈다. 12 그래서 주인은 세 번째로 종을 또 보냈더니 그들은 그 종마저 상처를 입히고 쫓아 보냈다. 13 포도원 주인은 '이제 어떻게 할까? 그러면 이번에는 내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내야겠다. 설마 내 아들이야 알아 주겠지'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게 상속자다.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포도원은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서로 짜고 나서 15 그를 포도원 밖으로 끌어 내어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 주인은 돌아 와서 그들을 죽여 버리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디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고 하신 성경 말씀은 무슨 뜻이냐? 18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누구나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그 돌에 깔리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마 것이다.' 19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은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잡으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무서워서 손을 대지 못하였다.

 

우리가 흔히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내어 놓지 않으면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느님에 의해 진멸을 당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라는 교훈으로 결론을 짓는,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 비유를 읽으면서 그래, 착하게 살아야해, 사랑하며 살아야 해, 섬기며 살아야 해하고 허벅지를 찌르며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그러한 초등학교 도덕 책 수준의 이야기를 목숨을 걸고 하셨을까요? 미리 읽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이 비유의 청자(聽者)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도()에 지나게 착하고 성실하고 진지한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술을 즐기고, 먹을 것을 탐하며 산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마태11:19)

여러분이 오늘의 비유를 이해하실 때 꼭 숙지해 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인간이라는 존재는 착하고, 선하고, 성실해 보이는 삶을 통해서도 자기의 영광과 유익만을 챙기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로 자신의 평판을 챙기고, 성실하고 진지한 종교행위로도 자신의 인기와 자랑을 챙기는 게 인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오히려 그러한 바리새적인 인간들의 더러운 위선(僞善)을 깨고 계신 것입니다. ‘착한 일 많이 해라가 아니라 그게 정말 하느님이 원하시는 착한 일이야?’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교는 바로 그 부분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선악 판단의 기준에 근거한 착한 일을 요구하신다고 믿고, 그러한 일에 매진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하늘의 열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 날의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의 가치 챙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2,000년 전 그러한 율법주의를 향해 일갈을 하며 내려오신 예수가 이 땅에 다시 내려오셔서 그때와 똑같이 너희들, 아직도 은혜의 구원에 너희들의 잘난 행위를 보태어 너희들의 자존심을 챙기고 있니? 회개하라라고 하신다면 이 시대의 교회는 또 다시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말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하거든요. 은혜 앞에서 티끌이 되지 못하는 인간들은 를 무시하는,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그런 존재는 그가 비록 예수라 할지라도 용서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지 2,000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편만하게 확장되고 있는 당신의 교회에 한 번 내려가 보고 싶으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당신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신 채 러시아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분은 연한 순처럼 연약해 보이셨고, 풍채도 없으셨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을 전혀 소유하지 못한 채 내려오셨습니다.

얼마나 못났으면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돌려 보기 싫어할 정도였습니다.(이사53,1-3) 심지어 그 분은 십자가를 지신 무력한 모습이셨습니다. 그러한 예수가 러시아의 한 교회 문 앞에서, 성당 안으로 예수를 예배하러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십자가를 진 초라한 예수를 본 그들은 이내 얼굴을 찡그리고 코를 막으며 그 분의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당신 누구요?’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너희들에게 영원한생명과 내 나라를 선물하기 위해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이렇게 십자가를 진 예수란다

그 말을 들은 성당 앞 교인들이 대답을 했습니다. ‘당신이 예수라고? 우리가 배운 예수하고는 너무 다른데? 당신이 그런 꼴을 하고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을 해 줄 수 있단 말이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난 너희들의 세상 소원을 들어주러 하늘 보좌를 떠나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란다. 난 너희들을, 죽음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를 진거야. 그렇게 날 못 알아보겠으면 너희들에게 나에 대해 가르친 너희 목자를 데리고 오너라

그들이 얼른 목자를 모셔왔습니다. 예수님은 반색을 하며 네가 이 교회 사제구나, 너는 나를 알아보겠니? 나야, . 너희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갈라2:20), 지금도 여전히 너희들의 죄와 정욕이 되어 매일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는 예수란다.(갈라5:24)’

그 말을 들은 사제가 예수님을 밀며 한 쪽 구석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교인들이 듣지 못하게 조용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거보세요. 지금 우리 교회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어요.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사람들을 모았는지 아세요? 십자가의 예수는 2,000년 전 사람이고, 지금 우리가 믿는 예수는 하늘 보좌에 앉아서 우리의 모든 소원과 필요를 열심히 채우시고 공급해 주시는 힘을 가진 예수라고 가르쳐서 겨우 이만큼 모은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지금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 버리면, 지금 성당 안에서 어렵사리 마련해온 헌금을 들고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내 꼴이 뭐가 됩니까? 사람들에게 몰매 맞고 쫓겨나기 전에 얼른 떠나세요. 당신이 이런 모습으로 자꾸 나타나면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어서 떠나세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를 제가 오늘 날의 상황에 맞게 조금 각색을 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왜곡된 현실 그리스도교 비판이 너무 적나라하게 우리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진짜 예수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그 사제의 말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의 현실은, 진짜 예수가 전해지면 전교가 되지 않는다는, 그 엉터리 목자의 말처럼 가짜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 찬양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그런 형국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이 세상 나라에서 당신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한 마디로 신처럼 살고 싶어서, 신이 되려 하는, 우리의 옛 자아의 자기부인과 이 죽음(死亡)의 땅의 부정이 그 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목적이었단 말입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아담 속에서 하느님처럼을 지향하던 우리의 옛 자아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과 욕심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갈라2:20)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5:24) 24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둘 다 과거시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우리의 정(파데마, 인간관계에서 얻는 힘과 만족)과 욕심(에피뒤미아, 정욕이나 욕망)도 십자가에서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십자가를 넘어서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면 됩니다. 맞습니까?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다르지요? 정말 현실 속에서의 우리 자신이 죽었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자기부인이 아니라, 자아성취를 위해 오늘도 매진하고 있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서 죽인자로 살기는커녕, 정과 욕심이 우리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2,000년 전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도대체 무엇을 이루고 간 것입니까? 하나도 그 말씀대로 되어진 것이 없잖아요?

십자가는 2,000년 전에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온 역사를 아우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이미아직이라는 이중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선언적으로 우리 옛 자아를 죽였고 우리의 정과 욕심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진행형의 우리 인생 속에서 또한 그 십자가의 현실을 실제 화하여 우리에게 경험케 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역동적 십자가의 이중성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2,000년 전에 골고다 위에 섰지만 그 십자가는 창세전에 하느님의 언약(계약) 안에서 영원 속에 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 속에서 선 십자가는 온 역사를 아우르며 십자가의 역할을 해 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나갔으니 이제 십자가가 이루어 놓은 복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어서 지워 버리세요.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나를 죽여서 남을 살리는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 그래서 십자가에 의해 구원을 받은 하늘나라 백성들은 그 순간부터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삶은 그 사람의 육적 삶을 부수기 시작합니다. 자아가 죽어야 남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역사의 어떤 정점에 찍어놓고 난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축복만 받으면 돼라는 무식한 자들은 여전히 라는 우상을 살찌우기 위해 여념이 없는 저주받은 인생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영원 속에서는 이미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느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지만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2,000년 전에 지신 그 십자가를 여전히 지시고, 이사야 53장의 그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의 정과 욕심과 옛 아담이 되셔서 계속 죽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聖徒)는 바로 그 역동적 십자가의 현실을, 신앙생활을 통하여 올바로 직시하고 경험하며 나 때문에 예수가 그런 수모를 당하셨구나를 가슴에 새기고, 죽은 흙에 불과한 나의 처음 자리와 그러한 쓰레기를 덮으신 예수의 영광과 능력과 사랑과 은혜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교만한 인간(아담)이 아닌, 겸손한 순종의 피조물로서 하느님 나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 속에서 자아 성취나, 성공이나, 번영 등을 꿈꾸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처음 자리를 폭로 당하며, 그 자궁 속의 핏덩이에 불과한 무력한 자신에게 계속해서 생명 줄을 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아담) 안에서 선악과를 따 먹고, 자신의 신 됨을 위해, 그렇게 자아 성취와 자아실현의 꿈을 꾸며, 열심히 자기 영광 챙기기와 자기 가치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들의 정과 욕심이 되셔서 오늘도 죽고 계신 예수가 보이면 어떤 반응이 오겠습니까? 쫓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깨끗하고 성실하게 잘 살고 있고, 열심히 종교 생활도 하고, 열심히 선한 일도 하며 잘 살고 있는데, 왜 지금까지 그런 추악한 십자가를 지고 나의 처음 자리를 폭로하느냐는 심보지요.

지금도 십자가에 달려서 처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더러운 존재들이 착한 일 몇 개 내어놓고, 도에 지나는 헌금, 선교, 봉사, 자선 같은 것들을 내어 놓고, 자신은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자아 성취의 쾌감을 맛보겠다고 하는 악마적 속성이 오늘 날 교회라는 곳에서 그대로 들켜지고 있지 않나요?

이렇게 인간들의 처음 자리 확인, 즉 자기 부인과, 그것을 값없이 덮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자기 영광 챙기기의 달인들인 세상 속에서는 배척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교회의 부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날 교회는 복음을 버리고, 예수를 버리고 부흥(富興)을 샀다.’ 복음에 물을 타고, 자기들 마음대로 몇 가지 부록들을 첨가하여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당 안에 사람들은 많아졌는데, 그들은 전부 자기의 소유를 늘리거나 건강을 챙기거나 훌륭한 평판을 챙기기 위해 모여들었을 뿐이지,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자신을 부인하라고 외치는, 예수를 알아보는 신자들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전교가 안 된다고...’

그러한 인간들의 자아성취와 자아실현의 욕구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였습니까? 바로 하느님처럼 되어보겠다고 선악과를 따 먹었던 아담과 하와에서부터였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창세기 때부터 신으로 살고 싶어 안달을 부렸던 존재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가증하고 어이없는 피조물의 욕구에 대해 반드시 죽으리라는 저주를 내리실 만큼 분노하십니다.

하느님은 시간과 역사의 전 영역을 통하여 그것을 깨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아성취와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자들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시간과 역사와 인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저주받을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는 역사의 어느 순간에도 멈추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점점 더 교활하고 교묘해져서 정당한 논리까지 갖추게 됩니다. 물질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 등으로 표출이 되는 자아성취의 욕구는 너무 쉽게 들켜 버리기도 하지만 쉽게 비판의 대상도 되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아성취의 또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도덕과 윤리와 종교 행위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전에 무소유라는 책을 쓰고 실제로 그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간 한 승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분은 무소유의 자유를 깨달은 이후부터 평생을 무소유의 삶을 살며 생을 즐겼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죽은 이후에도 그 무소유의 정신을 잇기 위해 자신의 장례식도 하지 말라고 했고, 더 이상 글 빚을 지기 싫다고 자신의 책도 출판을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 분이 무소유의 정신이 주는 자유를 깨닫게 된 계기가 이러합니다. 그 분이 평소에 난을 굉장히 좋아하셨는데, 난을 키워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게 키우기가 꽤 까탈스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꾸 거기에 매달리게 되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그 사랑하는 난 화분들을 전부 자기 친구에게 줘 버렸답니다. 그러고 나니 그러한 소유의 버림에서 참된 자유가 느껴지더라는 것이지요. 그 분은 인간 내면의 집착과 고통과 욕심이 소유에서 온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유가 온다고 생각을 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그 분의 집착과 고통과 욕심의 원인이었던 그 난 화분을 받은 친구는 뭡니까? 자기 친구의 집착과 고통과 욕심을 고스란히 떠안고 역시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걸 무소유라 하나요? 자신은 공수래공수거의 불교정신을 챙기겠다고 다른 이에게 소유가 주는 집착과 고통을 떠넘기는 것이 정말 칭찬 받을 만한 무소유의 정신이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인간이 이 세상에 올 때 공수래로 옵니까? 아무 것도 안 가지고 태어나나요?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올 때 라는 것을 쥐고 태어납니다. 절대 공수래가 아닙니다. 진정한 무소유의 정신이란, 태어날 때 쥐고 온 바로 그 에서 벗어나, 그 죄가 추구하는 모든 것에서부터 해방이 되는 것을 그리스도교적 무소유 정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라는 존재, 옛 자아를 버리는 것입니다.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옛 아담 적 속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참 된 버림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무소유의 삶입니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인간이 무엇인가에 집착을 하고, 그러한 집착으로부터 불만족스러움과 공허감을 느끼게 되고, 또 거기에서 오는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외부환경, 즉 소유의 있고 없음이나 배움의 정도 등에서 오는 것이 소유의 삶자기 안에 살과 피와 뼈로 녹아 있는 더러운 아담 적 죄 성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러한 공허감과 결핍의 고통을 채우기 위해 외부 환경을 개선하려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유를 늘리는 데에 애를 쓰기도 하고, 법정 스님처럼 소유를 버리려고 애를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환경과 여건을 바꾸어 집착과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로, 나는 괜찮은 인간인데 나의 외부의 환경이나 사물이 나를 지저분하게 만든다는, 더러운 인간의 자기중심적 자아 숭배의 모습인 것입니다. 만일 라는 내부의 원인이 아닌, 외부의 환경이 집착과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에덴이라는 그 완벽했던 환경 속에서의 아담이 왜 가시와 엉겅퀴에 걸렸겠습니까?

인간의 집착과 욕심,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고통 등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라는 존재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아담적 죄 성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걸 모르니까 결국 라는 존재의 평안과 행복과 만족한 삶을 위해 자기가 안고 있던 더러운 집착 덩어리를 남에게 서슴없이 던져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그러한 버림의 모습이, 끊임없이 소유를 늘이는 데에만 집착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멋지게 보일 수 있지만, 저에게는 여전히 자기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죄인의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은 죽으면서도 놓아지지를 않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이제는 더 이상 글 빚을 지기 싫다고 자신의 책을 절대 출판하지 말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건 자신의 글이 자신의 것이라는 소유의식에서 나온 유언입니다. 법정은 내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라는 진짜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았다는 것이 그 죽음의 순간에 들통이 나 버린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은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세상에게 인식시켜서 자신의 평판 챙기기, 영광 챙기기를 하고 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우리 소유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일단 내 몸부터가 내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창조주의 것입니다. 내 능력, 내 지혜, 내 힘, 모든 것이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과 지혜로부터 발생된 모든 것 또한 내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소유의 정신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옵니까? 무소유의 삶을 살자는 것은, 내 소유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 아닙니까? 그러니 내 것을 버리자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자기 소유가 없는 죽은 흙인 것입니다. 그 처음 자리의 현실을, 부자는 부자의 자리에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자리에서 열심히 깨닫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나의 도덕과 윤리, 선한 삶과 착한 삶까지도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없는 그런 자이구나'를 깨닫고, 하느님 앞에 납작 엎드려서 하느님 이제부터는 제가 선악의 판단을 하지 않겠습니다. 심지어 많이 가진 것은 욕심이 많은 나쁜 것이고, 적게 가지고 청빈 심지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그런 판단도 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 영광 챙기기를 위해 구제나 선행을 하는 이를 무조건 착하다 판단하지도 않을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손발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무력해 보이고 게을러 보이는 성도를 향해서도 게으르고 못난 자라는 평가를 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만이 선악 판단의 주체이십니다.’ 이게 바로 진짜 인간이 버려야 할 라는 소유를 버리는, 진짜 무소유의 삶, 자기부인의 삶인 것입니다. 진짜 무소유가 무엇인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해 놓으신 곳이 있습니다.

 

(마태19,27.29-30) 27 그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9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30 그러나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지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베드로가 마치 법정처럼 난 모든 걸 버렸는데요, 무슨 보상을 해 주실 거예요?’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그걸 널 위해 버린 거니? 아니면 진짜 내 이름을 위해 버린 거니?’ 인간은 얼마든지 자기의 영광을 챙기기 위해서도 소유를 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얼마 후에 베드로의 속셈이 폭로되지요? 누가 큰 자냐의 싸움. 그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는 이 세상에서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소유를 버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반대급부로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물질적 축복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은 명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세인들의 평가에 대한 만족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때에 그 버림, 무소유의 실천은 겉으로는 상당히 멋지게 보일 수 있지만 죄송하게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머릿속에 새기시고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신 후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가셔서 그 성전을 박살을 내십니다. 그리고는 그 성전에서 매일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율법을 상징하는 옛 성전을 숙정(肅淸)하신 예수님이 그 성전에 앉으셔서 무언가를 가르치셨다면 그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옛 성전의 무용함, 옛 성전의 한계, 옛 성전이 가리키던 것에 관한 것이었겠지요?

당시에 과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유대인들의 수가 200만 명이 훨씬 넘었다고 합니다. 아마 성전은 발 딛을 틈도 없이 빽빽하게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제사를 열심히 지내던 유대인들의 눈앞에서 성전을 모욕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수한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도에 대해 설명을 하셨을 것입니다. 구원은 율법과 행위로, 혹은 혈통이나 육정으로도 안 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십자가 복음이 율법의 상징인 성전에서 가르쳐졌습니다.

진짜 참 성전이, 모형으로서의 가짜 성전에서 가짜 성전을 무너뜨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랬더니 대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섣불리 나서지도 못하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대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네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냐고 묻습니다. 누가 너에게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고도 물었습니다. 어디서 배움도 없고 힘도 없는 자가 와서 세상의 힘과 가치를 모욕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세례자요한이라는 인물을 들이대십니다. ‘너희들에게 회개를 외친 세례자요한의 권세는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그건 세례요한에게 권세를 주신 하늘의 주인이 바로 당신에게 권세를 주신 분임을 암묵적으로 보이셨던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권세를 받아 이 세상에서 회개를 외치다가 결국 목 베임을 당해 죽는 그 권세가 바로 당신에게 있는 권세임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진짜 권세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느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는 순종의 권세라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가치를 챙겨서 세상의 왕처럼 살고 싶어 하는 죄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초라한 자기의 행색과 배경을 보고, 권세 운운하는 세상 권세 자들에게, 진짜 권세는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지를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알아들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큰 자인지를 가지고 다투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도 진짜 권세가 무엇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20:25~28) 25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예수님은, 진짜 권세는 세상이 힘으로 인정해 놓은 것들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진짜 권세라는 것을 자칭 세상 권세자라 생각하고 있는 인간(아담)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요한10:17~18)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18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내어 놓고 가신 권세는 아버지의 계명을 받고 이 땅에 내려와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권세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권세는 내가 무언가를 소유하고 얻어내고 계발하여 의 강함과 의 잘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모습으로 보여지고 무력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할지라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그 분이 의도하는 대로 판단하고 움직이고 쫒아가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세상 인간들의 나의 가치 챙기기의 삶은 종의 삶이고, 세례자 요한과 같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에게 맞아 죽어 가면서도 그 세상의 힘을 부인해 버리는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삶이 진짜 권세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러한 권세로 율법이라는 옛 성전을 부정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한 권세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오늘 본문의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가 던져지는 것입니다.

포도원이 있고 포도원 주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에 보내지는 주인의 종들이 나오고 맨 나중에 그 보내진 종들의 원형격인 주인의 아들이 포도원으로 보내져서 죽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구약 이사야서의 내용을 인용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사5:1~7) 1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2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3 예루살렘 시민들아! 유다 백성들아! 이제 나와 포도밭 사이를 판가름하여라. 4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5 이제 내가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너희에게 알리리라. 울타리를 걷어 짐승들에게 뜯기게 하고 담을 허물어 마구 짓밟히게 하리라. 6 망그러진 채 그대로 내버려 두리라. 순을 치지도 아니하고 김을 매지도 않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이게 하리라. 구름에게 비를 내리지 말라고 명하리라. 7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보다시피 포도원과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족속을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그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은 집단적으로 창세전에 구원을 받은 교회를 가리키고, 그 속의 포도원 농부들은 개별적 성도라 보면 이해가 훨씬 편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포도원은 주인에게 를 얻은 포도원입니다. 그러니 포도원의 소유주,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교회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라는 뜻이고, 주인이신 하느님에 의해 교회는 존재의 가치를 챙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그 주인에 의해 짓밟힐 수도 있는, 그런 하느님 의존적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교회라면 교회에서 반드시 맺혀져야 할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는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이며, 주인의 이익, 즉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자기부인과 하느님 영광에 대한 찬양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기 챙기기의 욕구는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흐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들의 유익과 영광을 채우려 합니다. 그들은 교회가 하느님께 세를 얻은, 하느님의 소유라는 것을 수시로 잊어버립니다.

그러한 교회의 현실이 구약에서 어떻게 그려집니까? 하느님의 백성을 모형하고 있던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율법과 제사를 지키며 자신들의 기특함과 자신들의 열심을 영광으로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렇게 기특한 자신들에게 구원도 약속하셔야 하고, 이 세상에서의 다윗 왕국의 회복, 즉 민속 메시아가 만들어내는 세상적 구원도 허락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언자들이 계속 보내졌습니다.

예언자들은 겉만 번드르르한 그들의 종교행위와 율법지킴의 행위를 부정하며 회개하라고 일갈을 했습니다. 자기 가치 챙기기와 자기 영광 챙기기의 열심을 부리며, 그것이 주는 쾌감을 쏠쏠하게 맛보고 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해 주기는커녕, 그것을 죄라고 지적하는 예언자들을 보는 족족 때려 죽였습니다. 인간 측에서 만들어 낸 종교적 열심과 도덕적 착함이 하느님의 종들을 때려죽인 것입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는 하느님의 백성 됨, 즉 이스라엘 됨은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의 도움 없이도 자신들의 힘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인간(아담)적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포도원 아들까지 살해하고 포도원을 자기들 소유로 만들려 시도했던 것입니다. 포도원, 즉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 이스라엘의 주인 됨의 권리는 자기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은 자기들의 교회됨을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도덕과 윤리도 지키며 살고 있는데, 주인의 종들이 와서는 다른 열매를 내 놓으라고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었나요? ‘회개하라였습니다. 그들은 절대 회개를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알아서 잘 하고 있는데 무슨 회개가 또 필요하단 말인가?’

그들은 그 주인의 종들의 요구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기부인의 열매, 포도원 주인의 주권을 인정하는 열매를 내 놓으라는 하느님의 예언자들의 요구는 자기 가치 챙기기에 열심을 부리던 그들의 심사를 심히 거스렸고 그들은 그 예언자들을 다 때려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포도원 농부들이 소출을 내어 놓지 않고 주인의 종들을 때려죽인 것은 포도 열매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주인이 맺으라는 열매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주인은 그 패역한 농부들의 행사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냅니다. 그건 자기 아들의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그 농부들에게 아들을 보냅니다. 아들은 자신이 뻔히 죽을 것을 알고도 그들에게 갑니다. 그리고는 예상한 대로 그들에게 맞아 죽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포도원 주인은 부자입니다. 농부들은 한낱 소작인 들입니다. 당시 지주들은 사병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들을 보낼 때 그 사병들을 함께 보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들도 살고 포도원 농부들도 치리(治理)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열 두 영도 더 되는 사병(천사)들을 다 마다하고 홀로 포도원에 내려가, 자기 가치 챙기기와 자기 영광 챙기기라는 엉뚱한 열매만을 내어 놓는 악한 농부들에게 맞아 죽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게 하늘의 권세라는 것을 세례자요한의 이야기에 덧 붙여서 설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른 모든 예수님의 비유는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비유만큼은 그들이 알아듣습니다. 본문 16절과 19절을 보세요.

 

(루가20:16,19) 16 주인은 돌아 와서 그들을 죽여 버리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디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은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잡으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무서워서 손을 대지 못하였다.

 

하늘의 비밀은 선택된 하느님 백성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마태13:10~11) 10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11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이 이 비유를 알아들었다는 말이 여기에 등장할까요? 지금 이 비유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처럼, 교회 안에서도 자기 영광 챙기기와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고 있는, 선택받은 성도들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청자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란 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악한 포도원 농부들처럼 여전히 라는 우상의 세상 적 권세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 교회의 주인,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 우리 포도원 농부들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앞에서 자신의 처음 자리를 확인하고 그 분의 은혜만을 꼭 붙드는 순종의 열매, 항복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는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인기와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런 몹쓸 포도원은 주인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이 원하는 열매도 못 맺는 그런 포도원이 주인에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러한 포도원과 포도원 지기들의 운명이 오늘 본문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루가20:15-16) 15 그를 포도원 밖으로 끌어 내어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 주인은 돌아 와서 그들을 죽여 버리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디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으라고 아들까지 보냈는데 그 아들마저 죽여 버린 포도원지기들과 그 포도원을 주인이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이사야서의 표현을 빌리면 포도원은 짓밟혀야 하고 포도원 지기는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다른 해결책을 내어 놓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죽인 아들,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 새로운 포도원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루가20:17-18) 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고 하신 성경 말씀은 무슨 뜻이냐? 18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누구나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그 돌에 깔리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마 것이다.'

 

주인이 내 놓으라고 하는 열매를 못 내 놓는 농부들은 다 죽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되지 말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길 그래, 그럴 거야. 만일 이 비유 속의 이야기대로 그러한 자들이 다 죽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면 왜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라는 말이 기록이 되어 있겠니?’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그러면이라는 접속사가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지금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권세에 의해 어떤 모양으로 성취될 것임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선악과를 따 먹고 하느님처럼 살겠다고 나선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집을 짓고 삽니다. 그 집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지어지지만 결국 모두 라는 자아의 집입니다. 그러한 세상의 건축자들은 너희들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라는 주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모퉁이 돌을 삼으라고 보내주신 예수라는 주춧돌을 죽여서 교회의 담장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종교적 열심과 도덕과 윤리에 근거한 착한 삶과 사회 정화, 사회 개혁, 자선과 봉사 등을 내어 놓으며 자기들의 집을 짓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어떤 집이라 했습니까?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 하셨습니다. ‘와디와디 위에 지은 집은, 건기에는 아주 단단한 기초 위에 훌륭하게 지어진 집처럼 보이지만 비가 오기만 하면 금방 물길로 변해버리는 그런 몹쓸 집이라 했지요? 바로 그런 집을 오늘 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아의 건축이 하느님 앞에서 그대로 존재 할 리가 만무입니다. 그러한 건축물이 어떻게 파괴가 되는지 보십시오.

 

(고전3:10~15) 10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능숙한 건축가가 되어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그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가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11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12 이 기초 위에다가 어떤 사람은 금으로, 어떤 사람은 은으로, 어떤 사람은 보석으로, 어떤 사람은 나무로, 어떤 사람은 마른 풀로, 어떤 사람은 짚으로 집을 짓는다고 합시다. 13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 줄 것입니다. 14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15 만일 그 집이 불에 타 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라는 기초() 위에 예수가 지으시는 집이 진짜 집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집인, 참 성전, 교회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만 받으십니다. 그래서 구약 제사의 제물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점도, 흠도 없는 예수 안에서 은혜로 바쳐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라는 기초 위에 인간들의 행위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 등으로 보태지면 그건 하느님 앞에 그대로 드려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인간들이 보태 놓은 것이 다 불에 타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건져내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 가운데에서 얻는, 오직 은혜로만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것이 구원이라면 인간들이 이 세상 속에서 열심히 자기 가치 챙기기의 일환으로 내어 놓았던 많은 행위들이 나중에 볼 때 어떤 것으로 판명이 나겠습니까? 손해지요? 그래서 15절이 그 집이 불에 타 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로 마쳐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낭패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제미오오, 손해를 입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성도가 이 땅에서 자기 가치 챙기기의 일환으로 내어 놓는 모든 행위는 다 불에 타 버릴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명쾌하게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루가20:18) 18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누구나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그 돌에 깔리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마 것이다.'

 

포도원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는 못된 인간들의 건축물을 그들에 의해 버려진 은혜의 돌, 예수가 박살을 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깨어짐이 은혜의 깨어짐이요, 거룩한 깨어짐인 것입니다. 그래야 새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아 성취의 건축물이 깨어지는 과정을 성경이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성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이 복음을 이해하고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권세, 자신을 부인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 진짜 권세를 받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러한 고난이 닥쳤을 때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고난의 순간에 예수라는 은혜의 모퉁이 돌에 의해 자아의 건축물이 부서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라고 붙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느님 제 가치 챙기기의 열매인 이 헌 집을 얼른 가져가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준비하신 은혜의 새 집을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애들은 그걸 아는데 왜 어른들이 그 걸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진정한 무소유는 그렇게 우리 안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자아의 집이 부수어 지고 하느님의 은혜와 영광만이 우리를 채우는 그 속에서만 성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인기와 명성과 평판과 유익을 위해 엉뚱한 위선의 행위들 내어 놓지 마세요. 그것 자체가 하느님을 모욕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왜 포도원 농부들이 아들을 죽였다고 합니까? 아들만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들 것이 되리라는 생각에 아들을 죽였다고 했지요? 사실 그건 당시에 통용되던 법이었습니다. 주인도 죽고 상속자도 죽으면 세를 놓았던 땅은 소작인의 것이 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죽이면서 그 포도원이 자기들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들이 주인의 실존을 애초부터 인정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주인이 살아있다는 인식이 있는 자들에게는 아들을 죽여도 여전히 주인이 있기에 포도원은 자기들 것이 될 수 없다는 자각이 반드시 들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열심히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결국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자아 성취라는 자기 가치 챙기기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무시한 것입니다.

그게 바리새인이었고 율법학자들이었으며, 오늘 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은혜를 붙들지 못하고 자신들의 유익과 평판을 위해 열심을 부리고 있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배우세요. 예수의 십자가를 배우십시오. 그 속에서만 진짜 열매가 맺혀질 수 있습니다.

열매를 요구하는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린 악한 농부들의 이야기가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그런 도덕적 요구가 아니라는 걸 잘 아시겠지요? 오히려 그러한 선한 행위로 자신의 더러움을 위장하고 가리려 하는 그 모든 자아 건축을 중단하라는 일갈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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