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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M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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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3-07-08 ㅣ No.54407

어제 엄마가 제가 자취를 하는 아파트에 오셨어요.

뭐.. 청소야 미리 말끔히 해놨으니 별 잔소리야 듣지 않겠지 했는데..

1박 2일 동안 잔소리만 하다 방금 가셨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침대를 보더니 엄마는 악! 소리를 내지르셨죠.

- 너 이거 언제 빨았어?

- 글쎄.. 산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 색깔 좀 봐라. 여기서 잠이 오니?

- 그거 원래 베이지색이라 그렇게 보이는 거야. 사실 알고 보면 별로 안 더러워.

- 한달에 한번은 빨아야 할 거 아냐.

- 세탁기 고장났잖아. 작아서 이불은 들어가지도 않고..

엄마는 침대 시트와 이불을 홱 걷어서 큰 비니루 봉다리(!)에 담으셨습니다.

이번 주말에 집에 와서 가지고 가라고 하셨죠.

꼼짝없이 이번주는 긴팔 입고 이불 없이 자야합니다.

 

그리고 냉장고를 보시더니 경악을 금치 못하셨죠.

- 히익...? 너 뭐 먹고 사냐?

- 저기 싱크대 보면 라면 한 박스 있어. 뭐 쌀도 있고. 참치캔도 있고. 구운 김도 있지.

- 그래도 이게 뭐야?

- 음식 하면 버리는 게 반이야. 음식 찌꺼기 버리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데.. 설거지도 그렇고.. 차라리 사먹고 말지.

- 너 아무래도 집에 들어와야겠다..

 

엄마는 짐을 꺼내서 온갖 음식을 꺼내셨어요.

요술 주머니 같더군요.

장바구니만한 가방에서 가지무침에, 김치에, 튀각에, 부침개에, 감자 조림에.. 심지어 닭 한마리와 인삼, 대추가 나왔을 때는..

이번엔 제 눈이 휘둥그레해졌습니다.

- 큰 냄비 어디 있어?

- 내가 큰 냄비가 무슨 필요가 있어? 나중에 이삿짐만 되지. 그러잖아도 책만 한 트럭인데.. 냄비까지 있으면 번잡해서 어떻게 살아..

- 음식은 어따가 해먹어?  

- 저기 냄비 있잖아. 라면 끓일 정도 크기면 되지.

- 너 라면만 먹고 사니?

- 라면, 짜짜로니, 비빔면, 생생우동... 종류대로 먹자면 되게 많아.

 

마지막으로 엄마가 묻더군요.

- 십자가는 어디 있어?

- 조오기..

- 어디?

- 조오기 있잖아.

엄마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방문에 걸려있는 1단짜리 묵주 하나가 달랑이었거든요..

 

하룻밤 주무시고 방금 버스를 타고 돌아가셨어요.

근데 사람의 뒷모습처럼 쓸쓸한 것이 또 있을까요?

엄마 뒷모습이 왠지 허전해서..

그냥 마음이 아렸습니다.

 

버스가 오는 것을 보자.. 엄마는 지갑을 꺼내서 재빨리 돈을 쥐어주셨죠.

그리고 그제서야 생각난듯이 아참! 하시더니 주머니에서 5단 묵주를 꺼내주셨습니다.

- 메쥬고리에서 누가 가져다 준 거야.

- 묵주는 나도 있잖아.

- 1단짜리 묵주 가지고 있으면 1단 밖에 더해?

- 그럼 뭐 15단짜리 가지고 있다고 매일 15단 하나..

- 어쨌든 가지고 있어.

엄마는 묵주를 쥐어주시고 이내 버스에 올라타셨습니다.

- 나 간다. 들어가.. 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키고..

결국 마지막의 잔소리는 ’성당 꼭 나가라..’ 입니다.

 

근데 전 압니다.

엄마 손가락은 그 묵주를 주고 싶어서 주머니 속에서 한참 동안 꼼지락거렸을 거라는 걸..

 

1박 2일 동안 엄마는 쓴 데 또 쓸고 닦은 데 또 닦고.. 음식을 한 냄비 가득 해놓고.. 그래놓고 가셨습니다.

전 엄마한테 근처 음식점에 가서 맛있다는 생선초밥을 사드리고..

아파트 옆에 있는 공원에 모시고 가서 밤에 두 시간 동안 산책을 한 것 밖엔 없어요.

그 공원엔 ’지압보도’라는 것이 있는데..

동글납작한 돌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길입니다.

맨발로 걸으면 지압효과가 있다고 하죠.

심장병에 좋다고 해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힘들다고 하는 엄마를 모시고 나갔죠.

빨리 걷는 걸 못 하시는 엄마 때문에 우리는 아주 천천히 한시간 정도를 걸었어요.

그리고 근처 분수대 앞에 앉아 한참 동안 이야기를 했습니다.

 

- 그 동안 성당 활동 죽어라하고 할 때에는 힘들기만 하다가..  왜 딱 그만 두고 나니까 상황이 나아지는 걸까?

- 바보야. 그 동안 힘들게 성당을 다녔으니까 지금 그 결과가 나타나는 거야. 미련하긴..

- 그런가..

- 기도가 그렇게 쉽게 이뤄지는 줄 아니? 그리고 널 위해서 기도한 사람들 덕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거야. 너희 신부님. 발바닥 신부님. 네 대모님. 최 마리아 할머니. 해설단 선배라는 마리아 언니.. 늘 감사해야 한다.. (발바닥 신부님이라 함은 제의에 발바닥이 그려져 있는 저와 동갑내기 새신부님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_-; )

엄마는 고마운 사람들을 한참이나 손가락으로 꼽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전 엄마만 보면 마음이 누그러져요.

엄마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레 성당을 다녔고..

그리고 아직까지도 든든한 제 신앙의 버팀목이 되주십니다.

그냥 우리 엄마이어서가 아니라 저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좋은 우리 엄마..

가끔은 엄마로 인해 제가 유아세례를 받고 이제껏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이야말로..

엄마에게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란 그런 거라고 하지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어하는 존재.

엄마는 신앙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나 봐요.

전 세상에는 신앙말고도 좋은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엄마는 한사코 신앙만이 가장 좋은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빠서 성당 못 다니더라도 크게 성공 좀 해봤으면 좋겠어. 아니면 돈이라도 많이 벌거나.."

이런 말 할 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아이구~~ 야야!! 아무 소용 없다."를 외치시는 엄마.

엄마는 제가 성당 간다고 집을 나설 때가 제일 예쁘다고 합니다.

아주 자랑스럽다고요.

 

그러고 보면..

엄마를 기쁘게 하는 일은 아주 쉽습니다.

이렇게 쉬운 걸.. 좀 자주, 잘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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