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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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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6-04 ㅣ No.112405

 

2017년 6월 4일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 사도 2,1-11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1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제2독서 1코린 12,3ㄷ-7.12-13

형제 여러분,

3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복음 요한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저는 인천교구의 전산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컴퓨터의 중요성이

부각될 때였습니다.

그래서 교구 내에서 어떻게

컴퓨터를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점점 더 IT 분야의

발전하면서 교회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어떤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컴퓨터 회사의 회장님께서

강사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1등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등은 금세 잊힐 뿐입니다.”
‘1등만이 성공’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당시 저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 족쇄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1등이 있다는 것은

1등을 제외한 99퍼센트의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 99퍼센트에

속할 확률이 높을까요?

아니면 1퍼센트에

속할 확률이 높을까요?

당연히 99퍼센트에 속할

확률이 월등히 높습니다.

게다가 1등은 2등, 3등, 4등,

꼴등이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지요.

즉, 누군가는 2등, 3등, 4등,

꼴등을 해야 합니다.
아마 1등만이 성공이라고

외치는 사람은 무인도에 혼자

살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곳에서는 나밖에 없으니까

무엇을 하든 ‘나는 모든 면에서

1등이야.’라면서 의기양양하게

살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러나 나 혼자 사는 무인도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

있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1퍼센트에 머물러야 한다면서

온 힘을 쏟아 부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수록 스트레스를 받고

초조해하면서 많은 것을 포기한 채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1등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행복한 꼴등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은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을 통해 모든 이들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다락방에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평화가 모두 사라져 있는 상태,

두려움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를 갖고 새롭게 변화될 수

있도록 해주는 성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커다란 절망 속에 빠졌지요.

예수님과 함께 했을 때는

최고의 삶, 1등 삶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재를

통해 그들은 실패의 삶,

꼴등의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세상의 눈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움직임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1등이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실패한 사람,

꼴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행복한 실패자,

행복한 꼴찌로 만들어줍니다. 

하늘이 치유할 수 없는 슬픔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토마스 모어)

성령의 강림(심순화 카타리나 작)

"두려움"

토끼가 숲 속에서 잠들어 있을 때

야자열매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깜짝 놀란 토끼는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고 숲 속의 동물들이

차례로 달리기 시작했지요.

기야는 산 중의 왕 호랑이도

뛰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동물들이

지쳐서 서로에게

왜 도망치는지를 물었습니다.

누가 대답을 했을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급하게 뛰는 것을 보고서

그냥 두려워서

함께 달렸을 뿐이었습니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바꾼다면

그 실체 없는 두려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길 수가 있습니다.
가을 추수 때가 되면 논밭에

 세워져 있는 허수아비를

볼 수 있습니다.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새들을 쫓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혹시 새를 잡은

허수아비를 본 적이 있습니까?

단지 새들이 허수아비를 보고서

두려워서 도망치는 것입니다.
사람 역시 허수아비를

두려워하는 새처럼,

별 것도 아닌 것에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아닐까요?

성령강림대축일 제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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