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안나 할머니의 예쁜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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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안 [jachoi] 쪽지 캡슐

2000-10-10 ㅣ No.1882

●…오후에 현리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과 코스모스 꽃길- 이 아름다운 가을풍경이 좋아

차창을 열고 일부러 천천히 차를 몰았다.

하남을 지나다 유난히 코스모스가 퍼드러지게 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몇장 찍었다.

현리는 장날이었다. 이곳 저곳을 들러 볼일을 보는데

과일 광주리를 놓고 파는 할머니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용포다리의 안나할머니였다.

"할머니, 여기 왠일이세요?"

팔러 나올 과일이 있을 턱이 없는데….

"나 여기서 놀고 있어요."

아침 10시에 현리에 놀러 나왔다가 차 한 대를 놓치고

다음 차를 기다리느라 양지바른 장터 바람벽에 앉아

과일 할머니와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시계를 보니 차가 출발하려면 아직 50분이나 남았다.

"할머니, 제 볼 일 얼른 끝내고 모시러 올께요.

여기 꼼짝말고 앉아계세요."

주일날도 할머니는 내차의 단골이다. 공소보다 본당에 가깝지만

지나오는 길이라 용포다리 정류장에 나와 계시면 꼭 모시고 온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차를 몰고 장거리로 들어오니

할머니가 안보였다. 금방 일어났다며 과일 할머니가

골목길로 뛰어가 불러주셨다. 바리바리 장을 보신

보따리 세 개를 싣고 장터를 떠났다.

"왜 거기 앉아계셨어요?"

"그 할망구가 양양 사람이래. 내 시집오기전 친정이 양양이거든."

안나 할머니는 지금 79세이다. 할아버지는 이미 30여년전에

돌아가셨다. 허리는 다 꼬부러졌지만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귀티가 나고, 항상 점잖으신 할머니다. 친정 얘기가 나오자

할머니는 지나온 삶의 보따리를 슬슬 풀어 놓으셨다.

차를 천천히 몰았다.

 

할머니는 양양에서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나 열여섯살에

이곳 하남으로 시집오셨다. 시집온지 1년만에 여덟살 연상의

할아버지는 조물주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 겠다며 금강산을

다녀와서는 "야, 거기가도 대답이 시원치 않더라."하시더란다.

그때 현리의 덕다리 부근에서 천주교를 다니며 옹기점을 하던

분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꼬치 꼬치 묻자 대답을 못하고,

다음에 신부님 오시면 한번 여쭤보라고 알려주었다.

할아버지는 미국인 신부님이 오시는 때에 맞춰 현리에 나가

신부님과 단 둘이 앉아 대화를 하고는 그 길로 교리를

받겠다고 자원해 1년동안 교리를 받고 베드로로 영세를 했다.

할머니도 뒤따라 1년간 교리를 받고 19세에 영세를 했다.

그 때는 얼마나 열심했는지 할머니네 집이 ’왜골 공소’역할을

했다. 그 뒤 가족 모두 홍천의 결운리 교우촌인  

점골에 사시며 홍천 본당 신축할 때 열심히 노동일도 했다.

얼마동안 홍천에 사시다가 의지할 곳 없는 친정 부모님을

모시기위해 이곳 하남으로 다시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은 막내 아들 내외와 함께 왜골 입구 조립식 주택에 사신다.

 

막내 아들 얘기가 나와 그동안 궁금했던 게 있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할머니, 며느리는 집에 있어요?"

할머니의 며느리는 필리핀 여자이다. 동네 사람들은

ㅌ교회 주선으로 합동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는 아니라고 한다. 나는 그사실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은 그쪽의 신앙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결혼하기 힘든 농촌의 현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다만 물설고, 낯설은 이국의 산골에 와서 집안에만 앉아 있는

그 여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열심한 신앙을 갖고 있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언제이건 참 신앙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었다.

할머니 집 앞까지 차를 몰고 들어갔다. 일부러 할머니의

보따리를 빼앗아들고 마당으로 성큼 성큼 들어섰다.

현관문이 열리며 외국여자가 할머니를 맞았다.

예상은 했었지만 조금은 멈칫했다. 아무렇지도 않은양

인사를 했다. 말이 없이 웃기만 했다.

할머니가 커피 마시고 가라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사양하고 돌아서 나왔다. 차에까지 오며 ’내가 왜 사양했지?’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다시 들어갈 구실을 만들기

위해 차 트렁크에서 책과 예수님 상본 하나를 꺼냈다.

마당으로 다시 들어서며 큰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다.

"심심할까봐 이 책 주고 갈려구요."

며느리는 문간에 서서 웃으며 고마워했다.

한국말을 잘 못한다고 들었기에 영어로 말했다.

"이 책은 아이들 월간 잡지이고, 이것은 예수님 상본입니다.

한글을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림도 많으니 심심할 때 보세요."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웃으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할머니, 저 갈께요."

"아니, 커피 한잔 하고 가라니까?"

어떻게 된게 이번에도 또 속 마음과 달리 사양했다.

마당을 성큼 성큼 가로질러 나오며 괜히 강아지에게

아는척을 했다. 운전대에 앉아서 후회를 했다.

’어휴 멍충이, 좀 앉았다 올걸.

바쁘게 나오느라 이름도 못물어봤잖아.’

어쨋든 길이 열린 듯 보였다.

다음에는 아들이 있을 때 찾아가 놀다 와야겠다.

60여년의 신앙 여정 속에서 어려운 상황을 맞은

안나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신앙의 대가 끊기는데….

기도 제목이 하나 더 생겼다.

<산골 공소의 선교사 일기 -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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