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가톨릭 - 흙 묻은 손을 모으고 ...
나는 전국을 돌며 성소의 씨앗을 키우고 열매를 맺도록 젊은이들을 돌보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장돌뱅이'라 부른다.
예수님과 함께 살고 싶어서 따라나선 걸음이 어느새 십 구년 째. 걸음마다 아름다운
이들을 만나고 금수강산의 수려한 멋에 감탄하면서 걸어가는 장돌뱅이 수녀이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제일 많은 눈이 내린 1991년 1월3일,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하느님의 집으로 이사 왔다.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이 있었다.
한겨울이었지만 봄처럼 포근한 날, 공소신자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신부님, 동생 신학생,
수녀님들과 함께 진도대교를 건너는데 그리도 행복할 수가 없었다.
차장 너머로 흩뿌리시는 아버지의 눈물과 차마 눈물 보이지 못하고 돌아서 흐느끼시는
어머니 마음까지도 고이 담으며 떠나왔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저녁에야 수녀원에 도착했다. 눈이 많이 내려 내일 오려나? 하고
객실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겨우 입회를 했으니, 자칫했으면 되돌아가야 할 뻔한 길이었다.
그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첫 말씀은 시편 65편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저희도 당신 집의 좋은 것을,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였다. 지금도 첫 마음을 일으킬 때 이 말씀을 읊조리곤 한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유년의 장면이 있다. 고향마을 공소에서 하루에 세 번 삼종이
울리면 들녘에서 농사일을 하시던 어르신들이 흙 묻은 손을 모으고 소리 내어 삼종기도를
바치는 모습이다. 그 소리는 내 영혼에 각인이 되었고, 손을 모은 이들의 풍경이 밀레의
만종보다 훨씬 더 숙연하게 새겨져 있다.
또 하나는 본당을 중심으로 13개 공소신자들이 1년에 한 번 한 곳에 모이는 부활절 잔칫날이다.
음식을 맡으신 어머니를 따라 해풍이 잘 드는 야산에서 진달래 꽃잎을 따와 화전을 부치기도
하고, 쑥을 뜯어 떡도 만들었다. 섬 전체가 잔치로 흥겨웠다.
그래서일까? 봄이 되면 어김없이 봄앓이를 겪는다. 일체의 것들을 놓고 그리움에 알아눕는다.
잔잔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청록빛 보리 물결을 지나 노오란 유채꽃길, 달빛향기 그윽한 흰
무꽃밭을 달려가던 내 고향 진도. 눈을 감고 누워도 너무나 선명하여 가슴 시린 그 빛깔...
그 안에 담겨오는 신앙공동체의 따뜻한 온정.
대부분이 신자인 마을에서 우리 집은 가장 늦깍이로 신자가 되었지만 내 놀이터는 언제나
성당이었고, 성경학교와 성탄절은 어김없이 참석했다.그래서 나의 수녀원 입회는 어릴 절
뛰어놀고 살았던 신앙적인 분위기를 장소만 옮겨온 것처럼 자연스럽다.
내 성소의 첫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추수가 한창이던 늦가을. 해가 저물었는데도 부모님은 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동생들을
저녁 먹여 재운 후 마당 가득 말려져 있던 벼가 밤이슬에 젖지 않도록 멍석을 접어 비닐을
씌워 놓고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멍석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데 초저녁별이 떠올랐다.
그때 내 마음에 쏴하며 쓸쓸하기도 하고 텅 빈 것도 같은 느낌이 스쳤다. 그 때는
무언지 몰랐지만 그 느낌은 내가 자라는 만큼 마음 안에서 더욱 커져갔다.
사춘기가 되어서야 그것이 '공허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었어도 그 느낌은 더욱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부모, 형제, 친구들로부터도
채워지지 않던 마음속 이 공간은 놀랍게도 기도를 하고 나면 채워지는 것이었다.
이 체험을 하면서 수녀원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삶은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이
절박하게 다가오면서 가장 소중한 삶을 살고 싶은 열망이 솟구쳤다.
내 마음을 읽은 친구의 권유로 통신성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잘못과 용서를 반복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한결 같이 돌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신뢰가 느껴졌다. 이런 분이라면
내 인생을 선뜻 맡겨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오랫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마음속 공간이 채워지는 것을 체험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 수녀원에 입회하겠다 말씀 드리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 동생도 신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어서 완강하게 말리셨다.
어머니는 내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차마 옮기지 못할 말씀도 서슴없이
하셨고 큰언니와 형부, 친구들이 번갈아가며 찾아와 설득하도록 하셨다.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고 하셨고, 마지막에는 선을 보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내 자리를 고수했다.
어머니의 반대가 너무도 극심하여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순전히 어머니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시간벌기 작전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묘하게도 신앙적인 활동과 기도를 더 깊이 할 수 있도록 영적
지도자를 보내주셔서 오히려 성소의 길을 더 확고하게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결국 4년이 지났어도 어머니가 바라신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길을 가야한다고 지지해 주시며 송아지를 팔아 입회준비를 해주셨다.
어머니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간이 거역할 수 없다. 내가 졌다. 그때 보냈으면 지금
즈음 수녀님이 되었을 텐테..."하셨다.
첫 휴가 때 공소회장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시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픈 마음으로 수녀원에 입회를 허락했다고 하셨다.
그 후 나는 송아지 팔아 수녀원에 온 사람이 되었다.
유일한 꿈이었던 문학도, 애착하던 부모님과 형제들을 떠나는 것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무한한 설레임 속에서 미지의 세계로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만을 믿고 따라 나섰다.
나는 젊은이들을 만나면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을 살피는 기도와
교육을 제일 먼저 한다.
몸과 마음의 욕구를 쾌락과 관능적인 충족이 아닌 그들이 갈망하는 친밀감, 사랑, 충만함의
느낌이나 외로움, 소외감, 불안 속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도록
동반해준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과 부르심을 일깨우고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여정을 걷게 한다.
성소의 싹을 지닌 이들에게 영적인 자양분을 주고, 가르치고, 일깨워 선택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는 동반자의 역할이 얼마나 복되고 신명나는 소명인가!
( 출처: 가톨릭다이제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