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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19811>에 대한 가벼운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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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근 [ojohn] 쪽지 캡슐

2001-04-25 ㅣ No.19816

신부님.

성직자가 성직자 관점에서 쓰신 신부님의 글은 다른 관점에서 세상과 복음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가벼운 분노와 슬픔 혹은 애처러움을 금할 수 없게 하는군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종 노릇을 자처하신 분이시니 기왕에 어느 한 쪽의 편을 들라치면

틀렸더라도 약자의 편을 들어야 옳을 것 같습니다.

하물며 같은 편인 강자의 편을 들고 계시니 더 할 말이 없군요.

신부님께서는 오랜 동안 노동자들과 함께 해 오셨는데

이제 신부님의 입장이 달라지셨나 봅니다.

본당신부님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하느님께 순종하시는 것만 강조됩니까?

그리스도의 성소이자 본분이 순종뿐이라는 말입니까?

복음은 어디로 갔나요? 또한 강생은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이 실감나는군요.

무엇보다도 신부님께서 쓰신 글의 논조는 누구를 훈계하거나 나무래고 타이르는 모양새인데

어떤 자격으로 신부님께서는 불특정 다수인 평신도들을 나무래시나요?

이 게시판에 참여하는 분들이 다 신부님보다는 세상 지혜도 더 많고 신앙심도 더 깊다고

생각하셨다면(꿈에라도) 그런 논조로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혹시 게시판을 이용하여 광범위한 사목을 원하시나요?

미래의 꿈이 혹시 고위???

그렇다면 더욱이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목이란 성직자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 수도자가 함께 어우러져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설마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아직 모르셨다면 사목에 관한 여러가지 문헌과 헌장 교서등을 샅샅이 훝어보세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신부님께서 평신도를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경멸조의 비아냥을 보자하면

`그렇게 성토하면 잠이 잘 옵니까?’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우습게 보이는 평신도들을 대상으로(싸잡아서)글 올리고 나니 신부님께서는 속이 후련하여 잠이 잘 오셨으며 또한 신부님께서 사랑하시고 돌보셔야 할 양떼들이 그렇게 성토하고 나서 잠이 잘 왔었다고 하면 그런 일을 계속 격려 권장하실 용의가 있으신가요?

김태화씨의 글을 잘 읽어 보셔야 할 분은 신부님인 것 같네요.  말씀대로 그 글에 전적으로 공감하셨다면 또 다른 비난의 화살을 다른 이웃에게 돌리기 전에 신부님께서 자신을 돌아보시고 다른 분들을 위해서는 조용히 기도드리셨어야지요. 남을 비난하면 안된다고 비난한 사람을 또 비난하고 계시는 걸 본인은 모르시는 모양이지요?

저는 지금까지 신부님들이 한데 모여서 다른 신부님이나 주교님들을 성토하시는 것은 종종

보았지만 평신도들이 그러는 것은 잘 보지 못했읍니다.  또한 그렇게 성토하시는 것에 대해서도 그럴만 하니까 한다고 여겼으며 그것 또한 또 다른 의미의 관심이 아닐까요?

정말로 밉거나 싫으면 무관심해지지요.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데 무엇때문에 성토를 합니까? 그래도 애정과 관심이 있으니까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거겠지요.

교회에 향한 애정과 관심은 성직자만 가져야 하나요?

또한 그것을 싸잡아서 헐뜯는다고만 생각하시면 그저 미사참례와 기도, 신부님께서 그렇게도 좋아하시는 것처럼 여겨지는 성삼일 전례 참석과 십자가의 길 그리고 판공성사와 교구장님의 권고에 의한 선교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자들의 의무만 다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입니까? 참으로 신비롭군요. 평신도에겐 권리는 없는 걸까요?

교회나 공동체가 그릇되면 그것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져야 하고 바로잡아야 할 사목 책임이 성직자 수도자 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부여되어 있다 이 말씀입니다.

누구로부터 부여되었느냐구요?

바로 신부님께서 필요할 때만 독점하려 하는 하느님과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고유한 권리입니다.

책임이자 권리이기에 그러한 때에 기도나 십자가의 길,판공성사나 축일 미사 참례 혹은 선교만 하고 있어서는 태만이라고 볼 수 있지요.

 

 누가 알아 준다고 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공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비판과 성토에 앞서 우선 나부터 내게 주어진 일을 단 한 가지라도 해야한다고 했는데

신부님께서 단정하신 그 평신도께서 비판과 성토에 앞서 주어진 일을 단 한 가지가 아니라 무척 열심히 하셨다면 어쩌시려고 그렇게 함부로 판단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신 신부님이 먼저 비판과 성토(제가 느끼기엔 경멸과 멸시로 여겨지지만)에 앞서서 주어진 일을 단 한 가지라도 하셨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그 답은 신부님만이

아시므로 굳이 물어보신 후 양심선언 같은 것은 불필요합니다.

신부님은 이번 사순절에 참된 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얼마나 하셨는지 몹씨 궁금하고

진정한 의미의 선교를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하셨는지도 더 나아가 희생과 절제(모든 분야에서)를 얼마나 하셨는지도 참으로 궁금하지만 그것 또한 신부님 자신의 몫으로 온전히 맡겨 드리겠읍니다.

 

신부님.

신부님께서 오랜동안 프라도 사제생활을 해 오셨고 또한 청소년들에게도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셨기에 그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애써 이 글을 올립니다.

이를테면 신부님께 관심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또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늘 가까이에서 신부님의 삶을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겠으며 기도 또한 게을리 하지 않겠읍니다.  신부님 한 분을 양성하시느라고 돌아가신 이용유 신부님,오 영진 올리비에 주교님,모든 프라도 가족들과 지오쎄 CWM 가족들이 얼마나 기도와 땀과 정성을 바쳤는지를 기억하십시요. 또한 신부님께서 프라도 관심자로 계실 때부터 부제,보좌신부를 거쳐 오시는 동안 함께 해 왔던 수많은 평신도들의 기도와 사랑을 되새겨 보십시요.

신부님이 서 계신 곳이 어디인지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겁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신부님께서 신부님보다 나이드신 어른들께 반말을 한다든가

가까이 함께 하는 평신도들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그것도 점점) 지켜 보면서 배신감과 비애를 많이 느껴왔는데 오늘 올린 글을 보니 그런 신부님의 모습이 절정에 다다른 것 같애서 더는 그대로 있을 수 가 없다고 여겨지는군요.

물론 받아들이고 말고는 신부님께 전적으로 달려 있읍니다.

누구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사는 것이지 남이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다만 신부님께서 처음 성소자로 출발하셨을 때의 모습을 간직하면서

그리스도가 낮은 자 되셨음을 깊이 묵상하고

무엇보다도 힘없는 평신도들을 멸시하거나 무시하지 말며

신부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신부님을 안타깝지만 애정어린 눈길로 지켜보고 있는

많은 가난한 이웃들의 가슴을 통해 하느님께서 사랑을 나누신다는 것을 알아 차리시고

복음의 가치를 따라 기쁘게 사시기를 다시 한 번 기도하겠읍니다.

이 글을 읽고 마음 상하셨다면 그 아픔까지 그분께 맡겨드리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선택하신 최민순 신부님의 시 `두메꽃’을

신부님께 도로 돌려 드립니다.

가슴 깊이 묵상해 보십시요.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 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 이 글이 또 다시 신부님을 헐뜯는 것으로 매도되지 말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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