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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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_"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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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5-18 ㅣ No.172523

성령강림 대축일을 기다리는 부활 제7주간의 마지막 평일 복음은 요한 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사랑의 대화가 막 끝난 뒤의 일이지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방금 예수님에게서 자신의 소명을 들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거취에 대해 의문이 생긴 것 같습니다. 사람 심리가 다 그런 걸까요? 수위권을 인정받은 제자면서도 예수님께 각별히 사랑 받았던 제자에게 모종의 경쟁의식을 가졌던 걸까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요한 21,22)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은 방금까지 오갔던 따사로운 사랑의 분위기를 냉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분위기, 언젠가 비슷하게 겪은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 하는지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라고 기가 막히게 빼어난 대답을 해서 엄청난 칭찬과 함께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약속받은 일이 있었죠. 이어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다가 "사탄"이라는 모진 소리까지 들었던 일 말입니다.(마태 16,13-23 참조)

베드로의 패턴일까요? 으쓱할 만큼 잘 나가다가 인간적인 부분에 발목이 잡혀 곤두박질 치면서 분위기를 냉각시키는 모습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정신을 차리도록,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며 경계선을 그으신 후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방금 전, 사랑의 대화가 오고 간 뒤에 하신 말씀, "나를 따라라!"에 주어 "너는"을 강조해 붙이셨네요. "~는"이라는 조사에서 강세가 느껴집니다. 개별성, 특화, 고유성을 강조하시려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무안하고 서운했을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 성령을 받아 교회 공동체를 꾸려나갈 그리스도 몸, 그 지체들의 주축이 될 사도들에게 예방주사가 될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라!" 하시는 주님의 초대는 그 양상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구 수만큼 다양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없다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하지요. 우리 각자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개성이 다른 만큼 그분께서 우리 각자를 필요로 하시는 부분과, 채워주고 싶으신 빈 곳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각자 부르심과 소명이 다른 것이고요.

하지만 이 당연한 진리가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 사이에서 걸림돌이 되곤 해왔습니다. 카인과 아벨 때부터 비교의식이나 시기 질투가 존재했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성이라 여겨야 할까요... 예수님 부활 체험까지 했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누가 더 높으냐 하는 문제로 티격태격하던 그들입니다. 진정 높아지는 길의 진수를 보여주셨던 스승 앞에서 이제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그 욕망이 뿌리째 사라진 건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도 오늘의 베드로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며 비판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비교 의식이나 시기, 질투를 합리화하거나 옹호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그저 베드로를 통해 비추어진 우리 모두의 민낯일 뿐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로마 체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동족을 이교 법정에 고발할 의도가 추호도 없었던 바오로는 유다인들의 계속되는 공격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로마까지 오게 됩니다. 바오로는 로마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새로운 길을 전파하지요.

당시 세계 권력의 변방 이스라엘이 아닌 힘의 중심지 로마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초를 닦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꽃길만 펼쳐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박해와 순교의 핏빛 역사가 쓰여질 것이고, 그로 인해 오히려 더 세찬 신앙이 불 일듯 일어날 것이니,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이 아니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또 이 길은 그야말로 바오로에게 허락된 그만의 길임을 알겠습니다. 그의 로마 시민 자격과 성장 환경, 지식, 기질과 성정 등 딱 그에게 맞는 부르심이고 소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 계획 안에 먼지만한 한 점도 못 되는 우리, 우주와 역사의 날줄 씨줄 전체를 조망할 능력이 없는 우리가 당장 눈에 보이는 나와 너의 외피에 집착하게 되면 중요한 걸 놓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주님과 각자의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주님과 그(그녀)의 관계에 호기심을 갖느라 정작 주님께서 나와 관계를 맺으시는 색깔과 온도와 향기, 농도와 밝기를 놓쳐버리는 우(愚)를 범하지는 말아야겠지요. 바오로에게는 바오로에게 맞는,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에게 맞는, 요한에게는 요한에게 맞는 것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내게 허락된 환경, 내가 받은 은총, 선물, 사랑, 자비가 나에게 꼭 맞는 맞춤형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에 대한 겸허한 평가와 겸손한 자존감이 필요하니 주님께 간절히 청해야 하고요.

간혹 주님께로부터 나만 소홀히 대접을 받는 것 같이 느껴져, 주님께 "이게 저에 대한 당신의 최선이냐?"고 당돌히 여쭙고 싶을 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곁눈질 하지 않는 우직하고 단순한 믿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일단 인생이라는 경주에 들어선 이상, 누가 더 뭘 얻었나 살피느라 발을 헛디디거나 목표를 잃지 않도록, 저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나의 주님"께만 집중해 달려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솔직담백한 질문 덕에 우리가 성령강림을 앞두고 새로이 심기일전 할 기회를 얻은 것 같습니다. 자기의 고유성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나를 포기한 게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 나를 창조해 가시는 하느님께 협력하고 있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최선임을 믿고 새롭게 화이팅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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