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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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환갑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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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mic2885] 쪽지 캡슐

2014-09-05 ㅣ No.82752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내의 환갑 즈음에

                                2013. 10.19. 지바고

 

 



아내는 항상 쓸고 닦았다.

화장실 거울, 바닥, 변기와 욕조,
씽크대, 식탁, 거실 바닥과 각 모서리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쓸고 닦았다

나는 현관문에도 나를 비추어볼 수 있고
화장실 타일에도 나를 비추어볼 수 있고
안방 천정에도, 거실 바닥에도 나를 비추어볼 수 있다

집안 전체가 나에게는 나를 파헤치는 입체 거울인 거다

너무 남루하고 지저분한 내 모습,
더 이상 더럽혀지지 말라고,
부지런히 씻고, 닦고, 털어내라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나는 지금까지 아내의 깊은 뜻을 모르고
나를 옥죄는  너무 많은 눈길들에 분통만 늘어놓았다

아내는 새 신발을 좋아했다
신발가게만 보면 참새와 방앗간이었다
먼 길 떠날 것처럼 새 신발을 신어보지만
아내는 결코 내 그림자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가을 하늘, 투명한 날개를 달고도 결국 제자리를 맴돌고 마는
고추잠자리처럼

아내는 선을 넘지 않는 절제된 제 삶의 모습으로 

 어리석은 내 방황의 무모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지금까지 아내의 깊은 뜻을 모르고
답답한 삶을 산다고 핀잔만 주어왔다

아내의 오선지엔 수많은 음표가 썩은 핏자국처럼 뿌려져 있다

비 오던 날, 전깃줄 위에 웅크리고 있던 울지 않는 참새 떼

꺽꺽거리는 신음으로 아내는 애써 자신을 지탱해갔지만
지금까지 귀 먹고, 눈 먼 채 나는
마냥 들리지 않는다고,
입을 확실히 벌리라고,
두 다리로 똑바로 서라고,
몸살엔 냉수마찰이 약이라고......,

나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돌팔이였던가

마음 열고, 머리 묶어,
아내의 신음이 반주 없는 노래로 와 닿을 때
소리 없는 아내의 음표에서 나는
숨은 겸손을 배운다
잔잔한 희생을 깨닫는다

아내가 열심히 닦아놓은 거울 덕분에
아내가 즐겨 골라 모은 새 신발 덕분에
아내의 썩은 핏자국 같은 소리 없는 음표 덕분에

나는 이렇게 건재하지 않은가

아내의 환갑 즈음에
때 늦은 깨달음이 눈가를 촉촉이 적신다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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