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4일 (금)
(녹)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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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일기77/김강정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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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daegun011] 쪽지 캡슐

2001-06-25 ㅣ No.3905

      사제관 일기 77

 

이곳에 부임한 지 오늘이 꼭 네 달째 되는 날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냐고 하시겠지만, 제게는 참 고달픈 달 수였습니다.

마음을 달리하면, 하루가 천년일 수도, 천년이 하루일 수도 있다는데,

저는 하루를 천년처럼 여기며 살았온 것 같습니다.

........

몸 부치고 살면 마음도 붙는다 시며,

재밌게 살자고 등을 토닥여주시던 어느 신부님.....

그 말씀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지만,

낯설고 어색한 환경에 정을 붙인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도 자연도 모두모두 다 낯설고, 눈 익은 것 하나 없습니다.

심지어, 오랜 친분의 낯익은 얼굴 하나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외로울 때 달려가 술한잔 사달라며, 생떼 놓을 동료사제 하나 없습니다.

.......

이역만리 땅을 ’예’라는 한 마디 대답만으로 오긴 했지만,

’아니오’ 라고 말하고 싶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외로웠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교우들이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말씀을 남기십니다.

"신부님, 이 정글 숲에 혼자 계시면 많이 무서우시겠어요......"

웃음으로 되 받으며 손을 가로 젓지만, 사실로 많이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무서워서 무서운게 아니라, 외로워서 무섭습니다.

무서운 것보다 더 무서운건 외로운 것이니까요...

 

혼자라서 외롭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혼자이기에 외로운 건 외로움이 아닙니다. 적적함 입니다.

혼자된 외로움보다 더 외로운 것 그것이 진짜 외로움입니다.

이 외로움은 여럿 안에서도 외롭고, 함께 있어도 외로운, 그런 외로움입니다.

 

바로 그 외로움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네 달을 그늘진 마음으로 살아야 했고,

그 외로움의 상처가 오늘에 이르러선 위중한 병이 되고 말았습니다.

몸보다 마음이 더 많이 망가지는 병,

백방의 가지수로 다스려도 손 쓸 수 없다는 마음의 병,

저는 그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

그 외로움의 연유가 사람에서 비롯됨이 실로 안타깝습니다.

왜 그렇게 서로를 외롭게 해야 하는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다들 외롭고 외로운 사람들끼리 그 외로움을 나누고 살면 좋으련만,

왜 미워하고, 상처주고, 그렇게 모진 삶을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

사람이 사람에게 얻는 이 병은 사람이 아니면 고칠 길이 없다 했습니다.

신이 오로지 사람에게만 맡겨놓았다는 치유의 비법,

이것이 마음의 병을 다스릴 유일한 처방입니다.

 

그러니, 제발로 이 마음의 병을 여러분들이 다스려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저의 힘이 되어 주시고,

제 곁에 늘 함께 서있는 반려의 한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그래서 저로 하여금 외로움을 잊고 사는 사제의 밤을 만들어 주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절망하고 고뇌하면서, 내일이 두려워지는 밤이 아니라,

여러분 때문에 하루를 감사하면서, 내일을 기다리는 그런 밤을 만들어주십시오

............

여러분이 서 계신 자리, 그 맨 한복판이 제가 서야 할 자리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도록 조금씩만 자리를 내어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

참으로 고독하고 외로운 사제의 길입니다.

너무도 어둡고 긴긴 외로움의 나날입니다.

이 공동체의 사제로서 제가 후회없는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여러분이 저를 믿듯이, 저도 여러분을 믿고 있음을 믿어주십시오.

당신을 믿는 이 사제의 믿음을 저버리지 마시고,

제 외로워진 마음을 꼬옥 붙들어 주십시오.

..........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힘을 잃고 지쳐있을 때, 제게 다가와 말없이 손 잡아주시던 분들.

"신부님. 힘내세요" 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던 분들.

그리고, 신부님을 보필하겠다며 한 마음을 주시던 존경하올 회장님들.

모두모두 좋은 분들이십니다.......

 

당신들이 계셔 저는 행복합니다.

하느님 편에 서서 말없는 길을 걸어가시는 제 신앙의 동지들,

당신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제 곁에 계시는 한,

저는 오랫동안 이 공동체의 사제로 그렇게 남아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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