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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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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3-11-28 ㅣ No.59043

넉넉치 못한 친구가 있습니다.

결혼한지 이제 일년이 조금 넘었지요.

옆에서 봐도 여간 쪼들리는 것이 아닌데도..

정작 그 친구는 안달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친구는 얼마 전 건강한 딸을 출산했습니다.

아휴.. 그러잖아도 교육비 때문에 허리가 휜다는데 앞으로 어떻게 한담.. 그 뿐이야. 세상은 또 얼마나 험하고.. 앞으로 얼마나 노심초사하게 될까..

축하하는 마음도 잠시, 제 딸도 아닌데 오지랍 넓은 저는 별 걱정을 다 합니다.

 

없는 걱정도 만들어 혼자 공시랑공시랑 하다가..

전화를 걸어 친구에게 넌즈시 말을 꺼냈습니다.

- 요즘은 분유값도 장난 아니라던데..

’너 어떡하려고 그러니’ 머릿 속에서 이 말이 뱅글뱅글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무척이나 평온한 목소리입니다.

- 응.. 모유 먹이기로 했어. 다행히 젖이 잘 나와..

시집 안 간(못 간??) 친구 앞에서 서슴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역시 아줌마는 아줌마인가 봅니다.

 

왠지 민망해서 전화기를 붙잡고 머리를 긁적긁적하다가 또 물었습니다.

- 뭐 필요한 거 없어? 내가 기저귀 사줄까? 아기옷은 다 준비해뒀어?  

역시 또 태평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 하긴.. 기저귀값도 장난 아니더라.. 그래서 천기저귀 쓰려고.. 옷은 형님네서 얻어다 입히기로 했고..

 

흐이구.. 이게 웬 궁상이람..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저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요즘은 내 자식, 내 자식 하면서 예쁘고 비싼 것 못 해줘서 안달이라는데.. 대체 하나 밖에 없는 딸 귀한 줄 몰라 이러나..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재차 물었습니다.

- 그래도 필요한 게 있을텐데.. 뭐든지 말해 봐. 너랑 나 사이에 부담 가질 게 뭐가 있니?

그제서야 친구는 머뭇머뭇하면서 말을 꺼냅니다.

- 지금 당장 급한 게 있긴 한데..

 

듣던 중 반가운 말입니다.

- 그래,그래. 뭔데?

- 그게.. 어려운 부탁이라서..

- 아이 참.. 별 걱정을 다 하네. 어려울 게 뭐가 있어.. 뭔데?

 

속으로 은근히 걱정도 됐지만.. 곧 마음을 굳게 다잡았습니다.

유모차 정도는 얼마든지 사준다. 가만 있어봐라.. 흔들이 침대는 얼마쯤 한다더라? 어른 침대만큼 비쌀까? 인터넷 쇼핑몰에서 미리 좀 봐둘 걸..

머리 속으로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 저는 결심합니다.

그래, 비싸면 얼마나 비싸겠어.. 까짓거 한번 쏘는 것 대범하게 쏘자!

 

눈까지 질끈 감고 저는 친구에게 재촉했습니다.

- 막달아..(친구의 세례명은 막달레나입니다.) 우리가 언제 재고 따지는 사이였니?

- 오래 전부터 너한테 꼭 부탁하고 싶었는데 네가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해서..

- 아이 참.. 얘가 시집가더니 엄청 소심해졌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이윽고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 우리 딸 대모 좀 서줄래?

오잉..?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부탁에 순간 말문이 막힙니다.

제가 대답을 못 하자 친구가 이어 말합니다.

- 아무래도 어렵지? 바쁜데 여기까지 내려오기도 힘들고..

 

하.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입니다.

- 아냐아냐. 어렵긴 뭐가 어려워.. 근데 벌써 영세하니? 이제 겨우 한달 지났는데 너무 이른 거 아냐?

- 이르긴.. 이름보다 세례명을 먼저 지어뒀는 걸..

- 그랬어..?

 

친구의 말을 듣고.. 전 갑자기 웃음이 나왔습니다.

애가 애를 낳았다고..  어쩜 그리도 무사태평할 수 있냐고.. 속으로 적잖이 걱정했는데..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준비는 일찌감치 끝내뒀던 겁니다.

- 야, 막달.. 너 진짜로 엄마가 됐구나..

 

전화 통화를 끝내고.. 전 참 대단한 친구를 뒀다고 생각했습니다.

맞아.. 경제적인 어려움은 큰 문제가 아냐.

 

아마 제 친구는..

어른 옷보다 더 비싸다는 아기옷을 입히지 않고도 아이를 풍요롭게 키울 겁니다.

가장 좋은 일등급 분유를 먹이지 않고도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겁니다.

조기 교육 열풍에 동승하지 않고도 아이를 현명하게 키울 겁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을 일찌감치 보고 맛들이게 했으니 그 아이는 걱정할 일 없이 무럭무럭 잘 클 겁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제 친구의 딸은 부족함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시민권을 얻기 위해 미국으로의 원정출산까지 감행하는 사람들도 있고 보니..

제 친구 딸의 처지는 딱하게조차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고.. 이 양엄마는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부족한 모든 것을 채울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사람이 채우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채워주실 겁니다.

 

그리고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세례를 통해 제 딸이 될 아이에게 과연 내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책임감..

 

아이를 통해 제가 정화되고 하느님께 더욱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올바른 신앙인으로서의 귀감은 될 수 없겠지만.. 아이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생명은 제게도 큰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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