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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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신앙상담은 아니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 가톨릭 신자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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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121.162.134.*]

2018-06-07 ㅣ No.11773

 

 † 찬미예수님

 

가족관계에서 부모와 자식 최선의 관계는 마땅히 성부와 성모와 성자 관계이지요. 천주교는 남녀 호주제라던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남녀양성 평등론을 피력하고 있으나 너와 나 신앙인들의 오류가 문제일것입니다. 따라서 따님에게 계속 친구처럼 부모처럼 가까이 지내시되 따님의 자존심 아닌 자존감을 독려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더우기 따님이 중학시절 학원 남친을 재회하여 한창 청춘인 시점 다시 열애(?)에 빠져있다고 하니 딸을 가진 부모 입장에서 신경이 많이 쓰일것입니다.

 

그런데 남친이 좋은 예방주사를 주었군요. "어떻게 부모님께?...," 이런 지적은(지적도) 분명히 좋은 지적입니다. 행복은 내가 추구하는 것이고 주님은 은총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도미노 현상으로 "내 딸이 시집에서 버릇 없다 못 배웠다 괄시 받으면 어떡하지?"신것 같은데 답은 하나!입니다. 지금부터 다시 기도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내 자아가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와 자녀가 하나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맞는 것입니다. 어설프게 기도하는 사람은 어설픈 열매를 맞이합니다. 그래서 이나라가 세 쌍 결혼한뒤 한 쌍 이혼하는 것이기에 기도, 이혼, 별거 등은 매순간 피할 수 없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아무리 잘먹고 잘 살아도 일생을 개미처럼 자족만 위해 사는 사람이라던가, 한국인 타고난 천재이지만 타고남보다 더 귀한 후천적 노력이 과유불급 등으로 인해 거미처럼 정채되고 있는것도 모두가 남 탓아닌 내 탓으로 돌리는 자세 또한 필요합니다. 무식한 정치인이나 선양의 겸손자 또한 크게 보면 고부고부이기 때문이지만 이보다 더 큰 지혜는 하느님 한 분만을 소유하는 자세입니다. 이는 내 죄가 중요한 것이 아닌 성부모의 은총이 중요하고 사람이 죽엇을 때에도 역시 내 슬픔보다 떠나는 분의 아픔을 반감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또한 성장 과정이기에 분심이 들 때 보다 범위를 넓게 생각하여 새로운 이 순간을 대처하는 태도(무엇을 위한 준비) 역시 중요합니다. 따님 또한 부모에게 버릇없이 흥분하고 그럴수 있으나 그것을 조율하는 것 역시 나를 그냥 그분 앞에 내려놓는것입니다. 

 

누구보다 자신을 먼저 반성하기도 할 것이며 남친이 그런것을 지적한 것 역시 친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것이다.로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선도해주십시오. 너와 나 '선교'로 하여금 기도는 '전교'의지를 복돋아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친의 선민의식으로만 비출수도 있는 그것을 이 다음 남녀 본능 사고 또한 성령의 열매로 가꾸고 수확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해주면 됩니다. 이때 아내의 몫은 침묵일수록 남자에게 아프겠으나 그것이 또한 명약이고 대화 또한 행복일 것입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것은 틀리지 않은 속담이지만 인간 또는 군중의 나약한 언어일수 있습니다. 기도의 힘은 한마음 한 몸 운동이기에 문재인 디모테오 대통령이나 박근혜 율리아나 수인이나 결코 남을 비교하지 않는 단단한 평화로 어떤 날은 정신 없이 돈버는 사람, 하루의 수확물 셀 틈도 없겠으나 이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영적 수확을 역시 셀 수 없는 기쁨과 보람으로 마감 하는가 하면 어떤 날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허무 속에서 잠자리 들 것이겠으나 이때의 내가 얼마나 주님 품에서 잠드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한 예가 될 것입니다. 

 

다 그런것 아니겠으나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섬세하지만 단순하고 가치 우선적일수 있기에 더 움추려들고 거칠고 복잡한 사회를 헤쳐 나가며 진취적이어야 할 남성과 끊임없는 갈등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성 특유의 보호본능으로 내조 연습을 즐기라고 하세요. 그리고 계속하여 엄마 아빠의 조언을 즐겨 들을수 있도록 선도하십시오. 꿈의 단계 - 갈등의 단계 - 조정, 극복의 단계라는 남녀 음양 또한 그냥 영원으로 이어지는 평행선 철로려니 하시고 그것을 탈선하지 않는 기쁨을 연구 개발하고 주입하십시오. 가족 노래방도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것들을 지금 이 순간 즐겨 향유(지향)하는 것이 관건이겠는데 얼마나 목적(천국)을, 때때로 치고 받는 불협화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종에서 친구처럼, 부모의 마음까지 헤아릴수 있는) 능동을, 또한 그 존재 가치등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지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잠수만 한다면 그 또한 위험한 시집살이 자체일 것입니다.


필자는 살아오면서 가장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행복한 장미 향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지마비 꽃동네 어린이 아닌 성인으로만 봐야 했던 이 생애 장애인들의 똥결이었습니다. 그들의 희망은 시도 때도 없는 휠체어 외출 또는 변을 갈아달라는 청이었는데 청탁이 아닌 그냥 명령이었습니다. 오늘날 장애인들은 왜 수급자이면서 이용자로 군림까지 해야 할까요? 그 답을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엔 냄새와 약품 등 섞인 오줌들 정말 지독하더군요. 수도빨은 왜 그렇게 쎈지 손으로 깔짝깔짝 하다가 얼굴에 똥물이 튀기기에 아예 짓이겨 빨다 보니 놀랍게도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똥결과 지극히 아름다운 향기로 변모 되던 그 순간을 기억해봅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처럼 영육 빨래를 많이 합니다. 그러고 다시 요요현상으로 거미 여정을 지나가기도 합니다. 다만 채험이라는 것이 존재하기에 타고남+후천적노력+채험 이 세가지를 계속하여 삼위일체화 되신 주님을 종이거나 친구이거나 때때로 버릇없이 종으로 부리거나 친구입네 하며 스스로 배타적으로 이어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절대 불변으로 때로는 폭포 사랑으로 때로는 호수처럼 거룩한 침묵으로 절대적 사랑과 자비를 부여해주시는 주님을 잊을수 없기에 여전히 모통이 머릿돌이 되겠다며 나를 버린(?) 사람들에게 복수혈전(?)을 꿈꾸기도 합니다. 이 역시 과거와 미래로 도둑맞지 않는 지금 이순간 내가 피해서도 안되고 피할수도 없으며 피하고 싶지않은 주님의 도구됨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님이 엄청 시상(詩想)이 높군요. 부모에게 감히 "너"라는 단어를 비유하니 말입니다. 성령안으로 무장되면 성질(성격과 기질)이 부드러운 사람 강한 사람 온유한 사람 능동적인 사람등으로 다시 시작됩니다. 주님 사랑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눈이 뒤집혀져 칼부림도 난무하고 부모, 자식관계 온데간데 없고 적과 적 되어 살인까지 난무하는 세상에서 나만 편하게 자리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네로남불 부메랑을 맞을것입니다. 패자는 늘 관객석에서 판결 못해 안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승자도 마찬가지기에 영원과 찰나의 무대 또한 식별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텅비고 시끄러운 순간들이 있는가 하면 열매 맺지 못하는 평화도 있겠으나 지금 그대로가 중요한 이유를 곰곰히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군중 사이를 오가는 문인(文人)들도 "너"라는 표기로서 주님을 비유하고 애인을, 사랑을, 그리움 기다림 등을 은유하기도 하는데 바리사이는 율법학자를 율법은 바리사이를 만나는 것 또한 즉, 악을 악이 먼저 심판하거나 사람이 죄를 지으면 숨는것 또한 순리일 뿐이니 딸과 함께 대화를 편히 할 수 있는 지금 그것을 재정돈 할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리는 것도 한 방법일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때때로 피할 수 없는 자기 반성 아닌 "수치심"이라는 무서운 독이 자리할 수 있음이니 과연 항구함과 거룩함 그리고 경건으로 배타 아닌 자비심 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을 즐겨 놀이하거나 집중할 수 있도록 해보십시오. 사실 질문자께서는 이미 잘하고 계심입니다. 나약한 인간의 아들, 딸 아닌 천주 성부, 성모님의 자녀로서 또한 아들, 딸 사고만이 아닌 초 현실적인 부모의 사고로서 자녀 걱정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적 가치로 볼 때 말과 말씀 차이는 지옥(지상의 감옥)과 천국(1. 육신의 탄생 2. 영혼의 탄생 3. 영원한 탄생 4. 부활)과 같아 그것을 여하히 방치되는 질료(재료)가 아닌 존재와 능동과 목적이 삼위일체 하느님 될 수 있도록 일조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과정에서의 말속의 말씀, 말씀속의 말을 무조건 말씀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이 순간에 감사하십시오. 결국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기에 자식을 위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하느님 마음이기 위해 조력자로 머물게 되는데 이는 하느님도, 성직자도 평신자도 비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임하며 지혜를 양산받는 부부로 이어질 것입니다. 왜냐면 온전히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들일수록 말보다 실천을 앞세워 현장에서도 합송하기 때문입니다.

 

실천보다 말이 나쁘다라는 단순 비판 사고에 휩쌓이기 쉬운 군중적 사고로 임하면 위험한 일이기에 남자들은 그렇게 때때로 무쏘의 뿔처럼 앞으로 나가고 여자들은 그렇게 뿌리를 가진 꽃으로 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니간 그것 아닌 미래의 그것으로 나간다면 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여전히 군중들은 싸움구경 불구경 쫓아 다니느라 세월을 소비 하기도 하기에 이 순간 제자리로 즉 하느님과 함께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묻지마 관광의 퇴폐 향락 또한 군중들처럼 단순 비판 정채가 아닌 묻지마 여정의 주님과 함께 딸처럼 다시 열애에 빠질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즐거운 것입니다. 이미 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언제 한 번 다시 차분히 그냥 얘기를 하던지 아니면 수다를 나누던지 따님과 함께 미사 참례하는 부모 자식으로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엄격한 교육으로 따지자면 수도 사제, 교구 사제 공동체 또한 회칙들 정말 엄격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일개 평신자의 사고일 뿐이고 너와 나 그렇게 영원을 향유하고 스스로 엄격 아닌 튜닝할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면 될 것입니다. 

 

따님으로 하여금 성직 공동체의 지, 청, 원(지원기, 청원기, 유기 무기 서원기)처럼 믿음, 소망, 사랑을 내것으로 만들되 청원보다 감사를 감사보다 찬미를 찬미보다 새로운 청원 등이 왜 기쁘고 희열에 찬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인지를 엄마 아빠 맘경청하며 조율의 즐거움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예수님처럼 어린 아이에게는 주입식을,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는 기적의 채험등을 전하되 섞갈리면 섞갈리는대로 성체거양 순간들도 기억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모쪼록 평화와 행복으로 멋진 열매 수확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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