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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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씸한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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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열 [alao9873] 쪽지 캡슐

2000-11-20 ㅣ No.2108

오전 11시 미사인데... 좀 늦었습니다.

걸어서 가려니, 정시에 본당에 당도하기가 힘들 듯 하였습니다.

총총걸음으로 걸어도 집에서 족히 15분은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끝에, 옆집 의과대 하숙생의 자전거를 빌리기로 했습니다.

빌리고자 그 친구를 찾아 갔는데, 만나지 못했습니다.

약간 미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채, 몰래 끌고 나올 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184cm 정도 키를 가진 청년의 다리 길이에 의거하여,안장에서 페달까지의 길이도

조정되어 있었기에, 제 다리길이에는 꽤나 버거운 감도 없지 않았지만...

아뭏튼, 신나게 페달을 저어서, 본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본당에 이르기 위해, 약 80m정도의 구불구불한 주택가 골목을 통과하던 중,

골목 한 가운데에 비둘기가 한 마리 버티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골목이

워낙 좁은지라, 비껴갈 수도 없는 편이었습니다.

 

10m 정도 앞서부터 뒷바퀴 제동장치를 조작하여, 자전거의 속력을 서서히 떨어

뜨리며, 계속 나아갈 밖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벨을 울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놈의 괘씸한 비둘기, 놀라서 달아나기는 커녕, 미동도 않더군요.

일단 올라타면, 저로서는 내리기가 무척 어렵게 tuning된 자전거인지라,

그냥 한 번 모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인즉,비둘기와 왼쪽 담벼락간의

3족장도 채 안되는 좁은 공간을 재주껏 통과해 보기로 했습니다.

 

앞바퀴는 담벼락과 비둘기, 그 어느 쪽과도 조우하지 않은 채,

그 난국을 빠져 나왔습니다. 뒷바퀴도 앞바퀴의 성공을 계속 이어받는가

싶더니... 이 건방진 비둘기, 성공예감을 향한 제 소박한 믿음의 틈새로

불쑥 비집고 뛰어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사적으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으며, 너무나도 당연히 그 자리에서

자전거와 함께 옆으로 굴러 나자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제사, 그 못된 놈의

비둘기도 놀라서 푸다닥 날아갔습니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허공을 향해,

"야이, 망할 XX아."라고 욕을 퍼부어대는 제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 ....

 

마땅히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항상 훌륭해 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 겁없음이 단지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아주 만만한 경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겠지요.

그걸 보고 용감하다고 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오늘 내가 비둘기를 향해, 던진 말을 누군가 나에게도 외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할 것 같군요. 우리의 주님도 저를 향해서 숱한 날을

그처럼 생각하고 계신지는 않은지...

 

그걸 생각하니, 더욱 찜찜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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