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0일 (목)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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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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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6-02 ㅣ No.172936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산으로 갔다(마르 14,22-26).”

 

 

 

1) 성체성사는 주님께서 우리를 먹이시는 성사입니다.

 

주님께서 먹이신다는 말에서, 이제벨의 박해로 목숨이

 

위험할 때 엘리야 예언자가 체험했던 일이 연상됩니다.

 

“(엘리야는) 하룻길을 더 걸어 광야로 나갔다. 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1열왕 19,4-8).”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소연하는 엘리야 예언자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직접

 

음식을 준비하셨고, 먹이셨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입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직접 먹이신 일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신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임무를 맡기기만 하시고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맡기신 그 임무를 우리가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면서 끊임없이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그런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즉 주님의 생명력을 날마다 받아먹고 있습니다.

 

 

 

2)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 기도는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을 도와달라는 기도만은

 

아니고, 물론 그것도 포함해서, 하느님 나라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또는 그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에 있는 ‘일용할 양식’은 육신을 위한

 

양식이면서 동시에 영혼을 위한 양식이기도 합니다.

 

<영성체는 ‘일용할 양식’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꼭 ‘일용할’(‘오늘 먹을’) 양식만 청하는가?

 

평생 먹을 양식을 청하면 더 좋지 않은가?

 

그것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으면

 

우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일’은 주님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내일의 삶’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3) 십자가도, 성체성사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큰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그리고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19-21).”

 

이 권고는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여라.” 라는 권고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의 말에는, “우리는 형제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눈에 보이는 형제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웃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4)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느님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1요한 4,8).

 

따라서 인간은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사랑으로 가득 찬

 

나라이고, 사랑으로 완성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어쩌면 지옥은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사랑만 없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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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체 성혈 대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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