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1일 (금)
(백)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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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성 갈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연중 제9주간 월요일): 마르코 12, 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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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승 [bona24] 쪽지 캡슐

2024-06-03 ㅣ No.172962

“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였다.”(12,7)

어떤 의미에서, 인생은 착각의 연속일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사람 수만큼 착각도 많은데, 그많은 사람의 착각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어떤 착각은 자신에게 희망을, 때론 자신에게 절망을 낳게 합니다. 마이클 샌델은, 한국어판 제목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불평등을 참아온 것은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즉 "기회가 평등하면 재능과 노력에 따라 누구나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수많은 통계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상승(=계층 이동)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진단한다.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난 미국인은 대개 가난한 성인이 되며 반대로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미국인은 부유한 성인이 된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은 다 공정하다는 착각 속에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포도밭 일꾼들 역시 불경하고 불손한 착각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맞이합니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런 엄청난 착각을 일으켰을까요? 이것을 알 때, 오늘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요약하자면, 어떤 포도밭 주인이 포도원을 조성한 후, 소작인들에게 소작으로 내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수확 철이 되자 소작료를 받아 오도록 종을 보냈지만, 처음 보낸 종을 때리고, 다른 종을 죽였으며 심지어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버리고 포도원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분명 비유이긴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당황스럽고(=그들은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 했다. 12,12),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왜 선량한 소작인들이 이렇게 사악하고 포악한 사람들로 바뀌었을까? 이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착각도 자유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소작인들의 착각을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인이 멀리 떠났다, 는 표현에 드러나듯이, 소작인들은 주인이 아주 멀리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주인이 함께 살거나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면, 감히 그들은 그런 어리석고 악한 생각과 그런 행동할 엄두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인의 눈치도 살피고, 혹여 소작을 다시 주지 않을까 생각해서 소작료를 제때 어김없이 바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착각의 시작은 바로 주인이 함께 가까이 없기에 어느 순간부터 슬금슬금 속임수도 쓰고, 슬쩍슬쩍 부정도 하면서, 욕심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랐을 것입니다. 급기야 그들은 소작료를 떼먹기도 하다 보니, 별 탈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소작인들과 함께 포도원을 통째로 삼키고 싶어진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과 이익에 눈이 멀어지면 마침내 폭력을 일삼는 강도도 되고 살인자도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인도 몰라보는 미친개가 되기도 하나 봅니다. 그러기에 루카 사가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12,15)하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우리도 때론 하느님이 너무 멀리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종을 보내고, 아들을 보내고, 오래 참으시는 인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악용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하느님이 계신다 해도 저 하늘 멀리 계셔서 우리가 하는 일을 잘 모를 거라고 착각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제때 처벌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가 살아남겠습니까? 하느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으시며,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영화 제목처럼, 우리가 하는 일을 다 아시지만 참고 기다려 주시고 인내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니 계신다, 모르신다, 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 아무런 정보가 없지만, 왜 주인은 포도원을 두고 멀리 떠나셨을까요? 포도원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었다면, 애당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하느님은 부재 가운데 현존하시고, 현존 가운데 부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떠나신 까닭은 바로 하느님의 편안함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에게 자유와 책임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어른의 덕목은 부재의 현존이며, 아니 계심 속에서도 함께 계심이기에, 이를 우리가 깨닫고 살아가길 바라시고 그래서 전부 다 맡기시고 떠나가신 것입니다. 

소작인들이 착각한 둘째 이유는, 오랫동안 어떤 일을 계속해서 맡고 일하다 보면, 남의 것이 자신 것인 양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의 것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처음엔 일할 기회를 마련해 준 주인에게 고맙고 감사로운 마음이 많았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소작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처음 가졌던 마음도 세월이 지나면서 처음 가졌던 마음은 식고 주인에게 바치는 소작료가 어느 순간 아까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의 신분을 망각하고, 해야 할 임무를 소홀히 한 채 마침내 포도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개소리야? 이게 우리가 땀 흘리고 애를 써서 거두어들인 수확인데 이걸 내놓으라고? 하나도 내어 줄 수 없어’, 그러면서 폭력으로 포도원을 집어삼킬 욕심에 눈이 뒤집혀 버리게 된 겁니다. 

우리 또한 자신이 현재 소유한 것을 너무 오래 사용하다 보니 하느님은 잊어버리고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오직 이 땅의 청지기(관리인)일 뿐이다.’(루12,35~48참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듣기 불편하시겠지만, 이 세상에 내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죽을 때 보면, 그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는 게 없습니다. 이 세상의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고 무상 임대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게 맡긴 것을 잘 사용하고 관리할 뿐입니다. 내게 잠시 맡긴 것을 마치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그때부터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잘못된 착각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우리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울러 착하고 충실한 소작인이 악하고 불충실한 소작인으로 돌변한 이유는 자신들의 마지막 순간을 알지 못했기에 착각한 것입니다. 포도밭 주인의 아들을 죽이면 모든 일이 다 잘 마무리될 것이라 분명 착각하고 오판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결말을 이렇게 담백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12,9) 모든 게 일장춘몽이라더니 그 결말이 그러했습니다. 삼일 천하가 웬 말입니까? 모든 것을 자신들에게 믿고 맡겼던 주인의 무서운 심판과 징벌이 있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한 치 앞도 미리 내다보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내일을 보지 못하고 알 수 없습니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으리라는 착각이 바로 그들의 착오였습니다. 참고 기다려 주신 주인의 마음, 곧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깨달아야 합니다.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 한해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루13,8 ~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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