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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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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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6-03 ㅣ No.172957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르 12,6-11)”

 

 

 

1)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는 비유이고, 누구든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비유의 전반부는(1절-5절)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예레미야서에 이 비유의 전반부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 7,25-2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기만

 

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도 있는데, ‘하느님의 기다림’을

 

‘무기한(無期限)’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회개를

 

한없이 기다리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신 심판 날이 되기 전까지만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심판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오늘일 수도 있고, ‘조금 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때는 ‘지금’입니다.

 

<또 “어차피 인간은 죄를 짓는 존재이고, 하느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분이다.” 라고 함부로 말해도 안 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무조건, 무제한으로 용서하시는 분이다.”

 

라는 뜻이 숨어 있는 말인데, 옳은 말이 아닙니다.

 

‘무조건, 무제한’이 아니라 ‘회개’ 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하느님은 용서와 자비만 베풀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때가 되면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용서와 자비를 거부하고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 비유의 후반부는(6절-11절)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언하신 말씀과 죄인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6절의 “그는 마지막으로”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악한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인간들을

 

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3,17).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알아보고, 자기들이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 아들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비유와 실제 상황에 차이가 있는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인 것은,

 

모르고 그랬더라도, 하느님께 반역한 것이고,

 

하느님 나라 건설을 크게 방해한 일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자기들 마음대로

 

차지하려고 한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비유와 실제 상황에 차이가 있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것이고, 사실은 유대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9절의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비유의 핵심 주제이고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맞지만,

 

그들이 선택된 민족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은총을

 

잃게 될 것이고, ‘다른 이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그 은총이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또는 예수님의 교회답게

 

살지 않으면, 우리도 받은 은총을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19-22).”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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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9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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