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1일 (금)
(백)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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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신부님_사랑과 지혜가 하나로 녹아있는 앎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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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6-03 ㅣ No.172953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삽시다>

 

 

오늘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르왕가와 21명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앎과 삶이 하나였던 순교성인들입니다. 무지한 우간다의 무왕가왕은 1885-1887년 사이에 참으로 터무니 없이 무죄한 많은 이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1964년 이 순교자들의 시성식때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강론일부를 인용합니다.

 

“순교자들의 영광은 재생의 표지입니다. 이 아프리카의 순교자들은 순교록에 지극히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더해 줍니다. 새시대의 첫 열매인 이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아프리카 대륙은 자유를 얻어 독립한 아프리카로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너무도 참혹하고 너무도 보배로웠던 이 희생이 마지막 희생이 되게 해 주십사 기원합니다.”

 

사랑과 앎과 삶은 함께 갑니다. 순교자들이 끊임없는 감동의 원천이 되는 것은 주님 향한 사랑과 앎과 삶의 일치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제대로 바르게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으로 알아야 살 수 있고 알기 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앎중에 앎이, 공부중의 공부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공부입니다. 이 공부보다 중요한 평생 공부는 없습니다. 이렇게 평생공부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제발 평생공부에 지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평생공부에 앞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참으로 한결같고 열렬한 바른 사랑이 필수전제조건입니다. 사랑과 앎과 삶은 함께 갑니다. 어디서 공부합니까? 혼자만의 공부는 부족합니다. 함께와 홀로가 함께 하는 공부여야 합니다. 이래서 공동체 학교에 몸담아야 합니다. 내 몸담아 살아가는 공동체는 말그대로 사랑의 학교, 섬김의 학교가 됩니다. 

 

졸업이 없는 공동체의 인생 학교에서 평생 학인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그리고 너와 나를 아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평생공부 제대로 못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참으로 깊이 사랑하여 바르게 알아 갈수록 나와 너를 바르게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이래야 무지의 편견이나 선입견의 오해나 착각함이 없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나와 너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참으로 있는 그대로 편견이나 오해없이 제대로 보고 아는 경우는 얼마나 힘든지요. 하나하나는 참으로 좋은 분들인데 극단의 이념이나 편견으로 굳어지면 거의 광적인 광신이나 맹신이 되어 도저히 바꾸어지지 않음을 봅니다. 편견의 광신이나 맹신에는 백약이 무효하고 여기서 파생되는 무수한 비극적 폭력과 살인입니다. 바로 이의 좋은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한 인간에 의해 부단히 반복되고 자행되는 현실입니다. 여기 나오는 불의와 탐욕의 소작인들은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주인과 소작인들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몰랐고 그럼으로 주인이 보낸 종들은 물론 주인이 마지막으로 보낸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여기서 주인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이고, 종들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이 파견한 무수한 예언자들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바로 여기서 소작인들은 당대 예수님을 배격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무수한 무지의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무지한 소작인들은 비단 잘못된 지도자들뿐 아니라 편견에 물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다음 시편 말씀은 당대의 예수님께 대적했던 무지한 지도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지를 일깨웁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라기만 하네.”

 

당대나 오늘이나 무지한 이들의 편견을 깨는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집짓는 무지한 이들이 내버린 돌, 바로 죽임당한 예수님을 부활시켜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는자 아무도 없습니다. 당대의 무지한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줄 알고 그분을 붙잡으로 했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났다 합니다. 

 

무지한 지도자들과는 달리 군중은 예수님을 알았던 것이나 이렇다 해도 군중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무지의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바로 보기는 정말 힘들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볼 수 있는 은총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때 주님의 은총에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이는 평생과정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궁극의 답을 제1독서에서 베드로가 줍니다.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를 무지의 편견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게 하시고 생명과 신심과 필요한 모든 것을 선사하십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어 주님은 우리의 분발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앎의 완성을 촉구합니다. 앎에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나와 너를 아는 앎에는 얼마나 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요!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열성-믿음-덕-앎-절제-인내-신심-형제애-사랑’이 하나로 연결된 복합적 실체입니다. 이런 앎의 은총은 영지주의자의 머리로만의 깨달음의 앎이 아니라 생활실천과 관련된 사랑과 삶이 하나로 녹아있는, 참으로 사랑과 지혜가 하나로 녹아있는 앎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말씀이 더욱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다산과 삼국지에 나오는 말씀도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스스로에게 당당할 만큼 힘껏 노력한 후에야, 운을 탓할 수 있다.”<다산>

“먼저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라(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삼국지> 

 

참으로 잘 익은 가을 열매들처럼, 사랑과 지혜의 삶중에 익어가야할 우리의 앎의 열매들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미사은총이 사랑과 지혜로 잘 익어가는 앎의 열매들이 되게 해 주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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