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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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9주간 수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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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2024-06-05 ㅣ No.173030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 마르 12,18-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두가이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믿는 부활이나 사후 세계와 같은 개념도 그저 현재 세상이 더 길게 이어지는 ‘연장’, 혹은 현재 세계의 상황이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는 ‘재현’이라고 이해하였지요. 그런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부활 같은 건 없다’는 자기들 주장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듭니다.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다른 이가 그 형제의 대를 이어주어야 한다고 기록한 신명기 수혼법의 ‘역연혼’ 규정을 들어, 일곱 형제 모두와 결혼했음에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은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던진 겁니다. 그런 애매모호하고 불편한 상황들 때문에라도 부활은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는걸 보여주고 싶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두가이들의 주장에서 드러난 영적 무지를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바로잡으십니다. 하나는 ‘성경에 대한 무지’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첫째로 성경에 대한 무지의 측면에서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였고, 인간의 합리적 사고라는 틀을 가지고 성경을 이해하려 들었기에, 내세와 부활과 영적 존재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이 세상에서의 삶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이 세상의 논리와 규칙으로 부활 이후의 삶을 규정지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지요. 둘째로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의 측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이성과 논리로 하느님의 권능을 제한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능력을 한 없이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능을 과소평가했고, 인간을 부활시키는 하느님의 능력이 고작해야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수준이라고 오해한 겁니다. 그러니 죽음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이 여러 곤란과 고통을 초래한다면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런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시고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정경으로 인정하는 모세오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부활의 개념을 설명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표현이라는 겁니다. 또한 부활이란 단지 죽음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를 그리고 영원을 사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그 사랑 안에 충실하게 머무르는 이들은 죽음마저 극복하고 하느님의 능력에 힘 입어 영원을 살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부활이지요. 그러나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고집과 편견 안에 갇혀 사는 이들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논리보다 한 없이 큰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그분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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