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강론자료

그리스도왕 대축일-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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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3-11-22 ㅣ No.534

연중 제 34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

 

        다니엘 7,13-14      묵시 1,5-8      요한 18.33-37

    2003. 11. 23.

주제 : 예수님이 보여준 왕의 모습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교회달력의 마지막 주간의 첫 날, 연중 34 주일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왕으로 믿고 고백하는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그 말을 기억하고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왕은 직책을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왕을 대한 적이 없기에 텔레비전 사극에서 볼 수 있는 왕의 모습을 기억할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그려지는 왕의 모습은 일하지 않고, 편히 놀고먹으면서도, 남들에게는 큰소리치는 사람, 그리고 가끔씩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자기 맘대로 이렇게 저렇게 처단하는 사람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억하고 기념하는 ‘그리스도 왕’은 사극(史劇)에서 볼 수 있는 왕과는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기억하는 그리스도왕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왕은 로마제국의 관리, 빌라도 앞에 서서 죄인으로 심문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행하신 일에 대해 질문하고, 예수님은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빌라도의 말에 응답하십니다.  ‘네가 왕이냐? //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그러다가 현실의 일밖에 볼 줄 몰랐던 로마 관리 빌라도는 ‘진리는 내가 다스리는 나라의 근간(根幹-뿌리와 줄기)’이라는 말에 당황해합니다.  그것만큼은 빌라도가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삶에서 올바른 길을 가고 싶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근간인 진리’에 대해서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왕, 예수님은 세상의 권력자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신의 모습을 떳떳이 보여줍니다.  빌라도에게 응답하신 ‘하느님 나라의 근간, 진리’는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소리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왕으로 불리는 것을 반기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오천 명의 사람들을 먹게 하신’ 다음, 백성들이 나서서 왕으로 모시려고 하자 그들을 뒤로하고 산으로 피해가신 분이라고 나옵니다.  그랬던 분이 빌라도 앞에서 왕의 모습을 혼자서 초라하게, 그러나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보여주십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권력과 명예에 대해서 초연한 모습이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그 모습을 따라야한다는 소리 없는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그렇게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 목적을 이루려고 우리는 세상과 적절하게 타협하려는 자세를 갖고 삽니다.  때로는 신앙의 길과 어긋나도, 때로는 신앙의 길이 말하는 것과 반대로 가더라도 우리는 별 고민 없이 그 길과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다음 우리가 살았던 그 모습을 보고 ‘진리의 왕’께서는 우리의 삶에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리실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삶을 감시하는 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이라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며 그 권리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제재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존재로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싶다면, 내 맘에 들지는 않아도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귀중한 존재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에 드러나는 것이지 나 혼자만 있을 때는 의미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광은 고통 다음에 온다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명예는 내가 어려움을 겪고 난 다음에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의 길을 갔기에 영광의 왕이 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과 똑같은 길을 우리도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격언으로 기억하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힘겨운 일과 영광은 형제이기 때문이고, 고통과 그것을 이겨낸 다음에 누릴 영광은 동전의 앞뒷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고통을 겪는 가운데서 왕이라는 고백을 받았고, 바로 그때에 세상을 위한 진리의 길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힘겹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힘겨운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고, 어쩔 수없이 우리가 견뎌낼 수밖에 없는 일들은 분명 세상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먼저 다가오려던 영광’들을 거부하신 이유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영광은 내가 바라는 시기에 나에게 와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무르익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본보기를 알기 원한다면 그분에 관한 증언이 담겨있는 성서를 읽고 자주 만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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