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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61: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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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9-05 ㅣ No.2125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61)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서양 선교사들 사이에서 외로웠던 유일한 조선인 사제, 최양업

 

 

-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본부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조선 선교사들 사진. 가톨릭평화신문 DB.

 

 

동료 사제가 될 수 없었던 최양업

 

“저는 제 동료 신부들이 올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그랬듯이 4500명의 고해성사를 듣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망가뜨리고 일을 비효율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몇몇 교우촌을 방문하지 않고 놔두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만주대목구 베르뇌 부주교가 비오 9세 교황으로부터 제4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직후 1855년 1월 22일 만주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장상 바랑 신부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만주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알려질 만큼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은 헌신적이었다. 비록 서양 선교사들이 자신을 망가뜨리게 하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단정 지을지라도 최양업 신부는 자기 몸이 부서질지언정 성사를 받기 위해 자신을 기다리는 교우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독자 중에는 베르뇌 주교가 최양업 신부를 염려해서 이런 글을 쓴 게 아니냐고 할 것이다. 문맥으로 봐서 그럴 수도 있다. 베르뇌 주교가 바랑 신부에게 조선 선교사 2명을 요청하면서 최양업 신부의 예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이 껄끄럽다. 베르뇌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동료 신부들”이 최양업 신부처럼 활동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페레올 주교도 그렇고 베르뇌 주교도 최양업 신부에게 단 한 번 ‘동료’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 선종 소식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알리면서도 “우리의 유일한 현지인 신부”(notre unique pretre indigene)라고 썼다. 최 신부의 임종을 지켜본 푸르티에 신부도 최양업 신부를 “우리의 착하고 너무나 아쉬운 조선인 사제”라고만 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페롱 신부도 최 신부를 “친구”(ami)라고 했지 “동료”(confrere)라 부르지 않았다.

 

당시 조선 선교사 대부분은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중반이었다. 베르뇌 주교도 1854년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됐을 때 만 40세였다. 그해 최양업 신부는 33세였다. 나이로 보면 최양업 신부와 조선의 선교사들은 열살 이내 또래였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바로 ‘신원’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대목구 사제’이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교황 파견 조선 선교사’였다. 조선에서 함께 사목하지만, 선교사들에 최양업 신부는 단지 ‘조선 현지인 사제’일 뿐이었다. 그들은 최양업 신부를 결코 ‘동료’라는 울타리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라진 성무활동비

 

동료가 아닌 만큼 차별이 따랐다. 무엇보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부터 선종할 때까지 조선대목구로부터 생활비 곧 ‘성무활동비’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당시 조선대목구는 파리외방전교회로부터 선교 지원금을, 프랑스 전교회와 성영회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교회를 운영했다. 아마도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도 선교 자금을 받았을 것이다.

 

베르뇌 주교는 이들 단체로부터 해마다 평균 3만 7000여 프랑(오늘날 환율로 약 4억 원)을 지원받아 조선 교회를 꾸려갔다. 이 선교 자금은 선교사 생활비, 주교관 운영비, 선교사 영입 및 선교사 물품 운송비, 신학생 양성과 인쇄소 운영비, 조선 성영회 사업비 등으로 쓰였다. 아울러 선교사들은 조선대목구에서 공식으로 받는 생활비 외에도 개인적으로 프랑스 신자들로부터 미사 예물과 감사 헌금을 받았다. 베르뇌 주교는 조선 선교사들에게 해마다 720프랑을, 자신과 다블뤼 주교에게는 그 2배인 1440프랑을 생활비로 지급했다.

 

베르뇌 주교는 박해를 피하고자 자주 거처를 옮겼다. 그는 자신이 묵을 집을 사들이는 데 수백 냥을 냈고, 함께 살면서 자신을 수발하는 신자 가족의 생활비로 해마다 2500~3000프랑을 지출했다. 하지만 그는 페레올 주교가 했던 것처럼 ‘현지인 사제는 신자들의 봉헌금으로, 유럽인 사제는 유럽에서 보내온 돈으로 생활한다’며 애초부터 최양업 신부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방상근, ‘베르뇌 주교의 조선 선교 활동-조선대목구의 수입과 지출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59, 59~90쪽, 한국교회사연구소 참조)

 

파리외방전교회 회칙에는 소신학교와 현지인 사제가 있는 선교지에 선교 자금을 지원하게 되어 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베르뇌 주교는 1858년 8월 14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쓴 편지에서 “회칙에서 소신학교와 현지인 사제가 있는 선교지에 상당량의 금액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음에도 조선은 12년 전부터 현지인 사제가 한 명 있고 몇 년 전부터는 소신학교도 한곳 있는데 그 어느 몫으로도 받은 적이 없다”고 불평했다. 자신은 최양업 신부에게 생활비를 한 푼도 지원하지 않으면서 최 신부의 몫으로 본부에서 돈을 타 내려 한 것이다.

 

 

양떼의 가난을 함께 한 사제

 

선교사들의 조선 생활은 프랑스에서의 삶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조선인 교우들보다는 넉넉했다. 다블뤼 주교는 ‘울트라-트라피스트급 절식’을 하고 있다고 표현했지만, 조선인 교우들에 비해 훨씬 잘 먹고 윤택하게 살았다.

 

“밥상엔 모든 음식이 한꺼번에 올라옵니다. 거기엔 때에 따라 두세 가지 음식이 놓이지요. 첫 번째는 소고기나 닭고기, 혹은 바다의 채소를 끓인 국이 있고, 두 번째는 밥 한 공기가 있으며, 세 번째는 꿩고기가 있어요. 예, 꿩고기라니까요. 그것은 겨우내 자주 밥상에 놓인답니다. 꿩고기가 없을 때는 작은 접시 위에 닭고기 넓적다리 부위나, 그것이 아닐 때에는 최소한 닭고기의 어느 부위가 몇 조각이 담겨 있지요.…술 인심은 후한 편이며 대체로 지나칠 정도입니다. 저는 각 산지의 술들을 다 마시는데, 술마다 맛이 제각각이고 색깔도 특이합니다.…저도 그 술들을 잘 즐기고 있습니다.”(다블뤼 신부가 1846년 8월 27일 여산 성치골<추정>에서 부모에게 쓴 편지)

 

선교사들은 일상의 이런 상차림 외에도 보르도산 적포도주, 코냑, 커피, 흑설탕, 초콜릿 등을 반입해 먹었고, 중국에서 검정과 보라색 비단을 들여와 수단을 지어 입었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귀국 후 선종 때까지 11년간 조선 교우들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과하게 표현하면 ‘탁발’ 곧 빌어먹었다. 그는 교우들과 함께 가난한 밥상을 나눴다. 하지만 그 밥상은 기쁨 반, 슬픔 반이었을 것이다. 교우들과 함께 소탈한 식사를 해서 기뻤고, 곤궁한 그들의 식량을 축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몄을 것이다. 이런 까닭인지 최 신부의 편지에는 유난히 가난한 교우들에 얽힌 사연이 많다. 그의 마지막 밥상은 주막의 차림상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집도 없었다. 정기적인 생활비를 받지 못하니 사제관을 장만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조선인 사제가 조선 땅에 쉴 곳 하나 없어 서양 선교사의 눈치 보며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저 혼자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허약합니다. 하루에 고작 40리(약 16㎞)밖에 못 걷습니다. 그래서 갈 길이 먼 교우촌 순방 때에는 항상 말을 타고 갑니다. 멀리 떨어진 지방들은 다 제가 순방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제가 다니는 거리는 7천 리(약 2750㎞)가 넘습니다. 저의 관할 구역이 넓어서 무려 다섯 도에 걸쳐 있고, 또 교우촌이 100개가 넘습니다. 그렇지만 여름철에 장마나 무더위나 농사일 때문에 순방할 수 없는 몇 달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허가가 있어도 제가 쉴 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페롱 신부님의 관할 구역으로 가서 안곡이라는 교우촌에서 여름휴가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도 쫓겨날 처지입니다.”(최양업 신부가 1859년 10월 12일 안곡 교우촌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차별과 가난은 최양업 신부에게 사치였다. 그는 이런 사소한 것에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곤궁한 신자들의 육적 배고픔과 영적 주림이 늘 우선 관심사였다. 그래서 그는 선교사들의 눈에는 무모해 보여도 해마다 2750㎞를 다니며 4500여 명의 교우에게 고해성사를 베풀고 성체를 영해 줬다. 최양업 신부는 교우들을 위해 차별을 뛰어넘고 ‘무소유’의 삶을 산 착한 사목자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9월 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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