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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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103위 시성과 한국교회2: 103위 시성이 가져온 변화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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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09 ㅣ No.621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 - 103위 시성과 한국교회] (2) 103위 시성이 가져온 변화의 바람


신앙활력 불어넣는 원동력으로 작용

 

 

시성식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신자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다.

 

 

“우리 교회의 순교 전통을 재확인하는 지금은 한국 복음화 제3세기의 새로운 장을 여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성식을 통해 이 땅의 빛이 되기 위한 우리의 결의를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다운 사랑과 평화, 그리스도의 자유와 정의를 선포하는 사도가 되고자 합니다.”

 

1984년 5월 6일.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103위 시성의 순간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25년이 흘렀다. 은경축을 맞은 우리 순교신심은 그동안 한국 교회에 어떠한 바람을 불게 했을까.

 

 

한국 교회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 I

 

김수환 추기경이 강조한 바와 같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봉헌했던 ‘복자 103위 시성식’은 한국 복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시성식은 한국 교회의 양적 팽창을 가능케 했으며 질적 성장이라는 실한 열매도 거뒀다.

 

우선 시성식 이후 가시적으로 보이는 변화의 바람은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 수’다. 전례없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과 현지에서의 시성식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많은 관심을 보냈던 것이다. 기존 신자의 경우에도 시성식은 신앙의 활력을 불어넣는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1983년 171만1,367명이었던 한국 천주교 신자 수는 시성식이 열린 1984년 184만8,476명, 다음해인 1985년 199만5,905명이 된다. 놀라운 것은, 시성식 당해 연도인 1984년부터 1985년 사이 인구 증가수가 40만4,788명으로 전 해인 1983~1984년 49만553명에 비해 적게 늘어났음에도 불구, 신자 수는 오히려 1만320명이 늘었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의 신자 수는 이후 해마다 증가하며 1986년 200만 명을 넘긴 214만8,607명이라는 비약적 발전을 거두게 되며, 1992년 300만 명을 돌파한 후 현재는 약 500만 명이라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한국 교회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 II

 

시성식 이후 불어온 가시적 변화의 바람이 신자 수 증가라는 교회의 ‘양적 팽창’이었다면, 보이지 않는 변화의 바람은 교회의 ‘질적 성장’이었다.

 

가톨릭대사전은 시성식 이후 성과에 대해 ▲ 신자들의 자발적 사적지 순례 ▲ 순교자 공경활동 ▲ 각 교구의 교회사연구소 설립 ▲ 자료수집과 연구활동 ▲ 교구차원의 사적지 개발과 기념관 건립 ▲ 다른 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노력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실제로 시성식을 전후로 수많은 기관 단체들이 생겨났으며 순교자 공경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일었다. 1983년 설립된 호남교회사연구소와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84년 개발되기 시작한 천호성지 등은 103위 시성이 가져온 변화의 바람에 한 예라고 보인다.

 

1984년 5월 6일 여의도에서 거행된 103위 시성식에 참석한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외국 성인명만을 세례명으로 써오다 한국 성인명을 세례명으로 쓸 수 있게 된 것도 한국 교회 내 큰 변화의 바람이었다. 시성을 기점으로 한국 신자들도 한국 성인명을 세례명으로 쓰며 그들의 신앙을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성식 이후 각 본당들은 한국 성인명을 세례명으로 쓰기 위해 많은 노력도 기울였다. 대건 안드레아, 하상 바오로, 정혜 엘리사벳 등이 그 예다.

 

주보성인을 한국 성인으로 둔 본당들도 생겨났다. 한국성인을 주보성인으로 한 본당들은 시성식을 이후로 점차 증가하더니 현재는 많은 본당들이 한국성인의 이름을 주보성인으로 두고 있다.

 

특히 기존 주보성인이 있는 본당은 제2주보성인을 한국성인의 이름으로 하기도 하는데 대구대교구는 제1주보성인을 루르드의 성모로, 제2주보성인을 성 이윤일 요한으로 하고 있으며 서울 천호동본당의 경우에도 성녀 안나와 함께 성 김성우 안토니오 또한 주보성인이다.

 

영남교회사연구소 마백락 부소장은 “한국 교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한 성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103위 성인이 탄생할 수 있었고, 정식으로 성인의 풍모로 변모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교황님의 한국 방문과 시성식이었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시성식 당시 쓰레기를 하나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 천주교에 대한 대외인식을 새로이 했던 점, 전국 성지순례가 한국 교회 내 하나의 문화로 자리한 점 등도 시성식이 가져온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다.

 

 

103위 시성식 대본 쓴 최홍준씨 - “새 복자탄생 기원해야”

 

 

“당시 교황님은 마포대교를 통해 들어오셨습니다. 무전으로 교황님 위치를 알고, 그 때 그 때 상황을 원고로 써서 드렸어요. 신자들은 ‘비바 일 빠빠(교황이여, 영원하라)’를 외쳤고요.”

 

1984년 5월 6일. 당시 대본을 맡았던 한국순교자현양회 최홍준(파비아노?67) 회장은 그때의 긴박함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의도 광장에 입장해서 장애인의 손을 쓰다듬고 김수환 추기경과 제단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마저 생생하다. 최홍준 회장의 원고대로 시성식은 장엄하게 전개됐고 시성청원과 103위 약전 낭독, 모든 성인 호칭기도, 시성선언문 낭독, 환호가 이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03위의 시성을 알리고 세계 교회 안에서 이분들을 공경하기를 명하니 팡파르가 울리고 비둘기가 날아올랐지요. 꼭 ‘103’마리였어요. 이때를 10시 27분 47초로 적어놨네요.”

 

에피소드도 있다. 본당 관계자들이 대회에 차질이 생길까 신자들이 화장실을 자주 드나들지 못하도록 그 전날부터 물을 많이 마시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그날의 감동을 좀 더 느끼기 위해 새벽 6시부터 많은 신자들이 여의도 광장에 줄을 서기도 했다.

 

“직접 교황님을 보며 큰 대회를 치루고 나니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신앙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순교자들의 시성을 통해 그분들의 삶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도 했고요.”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의 대본을 쓰면서 서울대교구와 인연이 닿았던 그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의 대본도 맡게 됐다. 여러 차례 큰 대회를 거치며 그는 본당 사목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는 등 신앙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그는 순교자들의 시성은 그들의 영광이 아닌, 살아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분들의 삶은 우리를 각성하게 만듭니다. 우리들에게 시성의 참 뜻은 그러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분들의 신앙을 배우고 또 서로 일깨워줘야 합니다.”

 

또 새롭게 시복시성의 절차를 밟고 있는 증거자 최양업 신부와 124위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도 빼놓지 않았다.

 

“한국 교회 신자들은 새로운 복자 탄생을 기원해야 합니다. 25년 전, 그 때 그 마음으로 돌아가 우리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온 마음으로 염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톨릭신문, 2009년 5월 10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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