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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103위 시성과 한국교회1: 103위 시성식이 있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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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09 ㅣ No.619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 - 103위 시성과 한국교회] (1) 103위 시성식이 있기까지


순교신앙 공경하며 '증거하는 삶' 다짐

 

 

1984년 5월 6일 ‘증거의 날’ 서울 여의도광장에 모인 100만 신자들은 신앙선조들의 시성을 위해 무릎을 꿇은 채 한 마음으로 ‘모든 성인 호칭 기도’를 노래했다. 기해 · 병오박해 79위, 병인박해 24위 순교자들이 이날 시성되기까지 145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아, 어찌 이 기쁨을 감추겠습니까! 이 땅에 빛이, 구원의 빛이 비추인지 어언 200년! 그동안 우리 선조들은 목숨을 바치며 그리스도 주님을 증거했으니 오! 영광의 세월이여, 축복받은 민족이여.”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및 103위 시성식’에서 사회자는 이날의 감동과 영광을 이렇게 표현했다. 가톨릭이 이 땅에 뿌리 내린지 200주년을 맞았으며 한국교회에도 103위의 성인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꼭 ‘25년’이 흘렀다.

 

오늘날, 우리는 25년 전 성인을 맞았던 그 감동을 기억하고 있을까. 순교신심을 통해 새로운 신앙을 다짐했던 그날의 마음대로 살고 있을까.

 

가톨릭신문은 ‘103위 시성과 한국교회’ 기획을 통해 시성 25주년의 감동을 돌이켜보고, 우리에게 던져진 숙제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시성식, 그때 그 감동

 

“지극히 공경하올 교황 성하, 자모이신 성교회는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위 한국 순교자들을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이 성인으로 받들어 공경할 수 있도록 성하께서 친히 성인 명부에 올려주시기를 청원합니다.”

 

여의도 광장에 운집한 100만 명의 군중들은 한 마음으로 103위의 시성을 청원했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및 103위 시성식’의 감동스러운 현장이다.

 

‘비바 일 빠빠(교황이여, 영원하라)’를 연호하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을 기뻐하던 신자들은 미사 봉헌 중 103위 시성식이 시작되자 모두 숙연해진다.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103위 약전을 낭독했고, 모두 무릎을 꿇은 채 ‘모든 성인 호칭 기도’를 노래한다.

 

103위 성인을 부르는 긴 노래가 끝나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판정하고 결정하여 성인들 명부에 올리는 바이며, 세계 교회 안에서 이분들을 다른 성인들과 함께 정성되이 공경하기를 명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

 

팡파레가 울리며 성인의 숫자를 뜻하는 ‘103’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대영광송이 이어졌고 미사가 이어졌다. 영성체 또한 ‘103’명의 신자들이 직접 교황에게 성체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기념행사의 대본을 담당했던 한국순교자현양회 최홍준 회장은 “당시 신자들은 쓰레기를 하나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질서정연했다”며 “시성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을 알고, 가톨릭 신자 또한 크게 늘어났다”고 말했다.

 

이날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행사위원회가 지정한 ‘증거의 날’이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교황의 일정을 ▲ 5월 3일 오신 날 ▲ 5월 4일 화해의 날 ▲ 5월 5일 나눔의 날 ▲ 5월 6일 증거의 날 ▲ 5월 7일 떠나신 날로 지정했는데, 이 중 103위 시성식이 열렸던 ‘증거의 날’은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우리 신앙선조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한국교회 103위 성인 탄생 기록.

 

 

103위 성인이 탄생하기까지

 

1984년 103위 시성식의 감동이 있기까지에는 수많은 과정과 노력이 숨어있었다. 기해·병오박해 79위 순교자와 병인박해 24위 순교자들이 복자가 되고 성인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인의 탄생은 1839년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표 참조).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박해보고서를 작성하고 1847년 페레올 주교가 ‘증보판 기해일기’를 완성한다. 이 기록을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하는데 이것이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다. 이 기록은 파리로 보내져 1847년 10월 교황청 예부성성에 제출된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후 당시 뮈텔 신부는 병인박해 순교자 조사 작업에 착수한다. 이후 뮈텔 신부가 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며 다시 한국에 입국, 병인박해 순교자에 대한 조사 작업을 본격화했다.

 

이후 오랜 조사와 재판을 통해 1925년 7월, 교황청은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기적 심사 면제령과 함께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기해·병오박해 79위 순교자들을 시복한다.

 

교황청은 병인박해 당시 숨진 순교자 24위 또한 지속적인 조사와 재판 과정을 거쳐 1968년 10월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했다.

 

1975년 9월, 한국교회에는 103위 복자를 시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103위 복자의 시성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다음해인 1976년, 교황청에 103위 복자들의 시성청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시성청원서를 제출한 지 2년 후인 1978년, 한국 복자 103위의 시성 건이 교황청에 정식 접수됐으며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03위의 시성 승인을 선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듬해인 1984년, 한국교회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및 103위 시성식이라는 겹경사를 맞았고, 성인들의 삶을 공경하며 ‘증거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가톨릭신문, 2009년 5월 3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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