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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체ㅣ구역반

소공동체를 위하여3: 기초공동체와 하느님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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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70

소공동체를 위하여 : 제3강 기초공동체와 하느님 백성

 

 

* 이 글은 지난해 대구복자성당에서 있었던 최병화(요셉)님의 대림절특강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 베드로 전서 2,9-10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 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전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분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 교회헌장 2장 전체

 

기초공동체의 구성원은 하느님 백성이다. 이번 강의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하여 공부해 보자. 베드로 전서 2,9-10에서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또한 자비도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고 자비를 받는 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교회헌장 2장 전체에서도 하느님의 백성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1. 하느님의 백성은 소명과 사명을 가진 백성이다.

 

소명과 사명에 대해서는 자주 들은 것 같지만, 이번 기회에 정확한 말뜻을 정리해 보자. 먼저 소명이란 군대에서 소집영장이 오면 입대하는 것과 같다. 소집을 입대라고 말하기보다는 ‘응소’라고 하는 것이 더 명확한 표현이다. 입대하여 군인이 되면, 무엇보다 군인의 사명은 국토방위에 대한 사명을 지닌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는 참 다양한 일거리가 있다. 소총수가 있고, 대포를 조작하는 이가 있고,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이 있고, 밥을 하는 일도 있고, 운전을 하는 일도 있다. 그래서 그것을 세분화하여 주특기라고 한다. 600은 운전, 713은 공병 중에서도 보급, 즉 페인트, 시멘트, 목재 이런 것들을 보급하는 일을 한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소집영장을 주셨다. 초청장을 주시는데, 이것을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림을 받아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하느님 백성의 사명은 복음선포이다. 군인의 사명이 국토방위이듯 하느님 백성의 사명은 복음선포인 것이다. 복음선포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봉사할 수 있다. 주특기에 따라서 군복무를 하듯 복음선포에도 그 사람의 재능에 따라 다양하다. 글 쓰는 이는 작품을 통해서, 음성이 좋은 사람은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것처럼 사명을 수행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마태복음 25장 14절에서 30절에는 달란트 비유가 나온다. 이 달란트는 재능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어떤 분은 “저는 아무 재능도 없고 밥밖에 못합니다.”라고 하는데, 음식을 잘하는 것도 큰 재능이다. 남자들이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다 보면,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또 어떤 분이 재능이 없다고 완강하게 반장자리를 사양하시기에,  “발은 튼튼합니까?” “예, 발은 튼튼해요.” “그러면 발로 뛰어 다니며 본당소식만 전하세요.” 라고 한 적이 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고 땅속에 묻어 두었다. 주인이 돌아와서 금화 하나마저 빼앗아 버렸다. 재능의 적고 많음은 중요하지 않다. 있는 재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쁘다. 예전에 헛간에 두던 대형저울은 추수가 끝나면 쌀가마니의 무게를 재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금은방에 있는 작은 저울은 그 필요에 따라서 늘 사용한다. 큰 저울이 일년에 한두 번 사용하는 것에 비해, 금은방에 있는 작은 저울은 늘 그 자리에서 자주 유용하게 사용된다. 사용 용도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반장이나 구역장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다 보면 노하우도 생기기 마련인 것을, 처음부터 겁먹지 말자.

 

 

2.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과 사귀는 백성이다.

 

서두에 베드로 전서의 말씀처럼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백성이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존 포엘(John Poel)은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에게는 신학도 하느님을 만나게 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친구들 가운데 유명한 친구가 있다면 “아, 그 친구, 초등학교 동창이야.”라며 자랑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친구가 되겠다고 하셨다. 요한 15, 14-15에서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하신다. 하느님과 사귐이 모든 이와의 사귐에 바탕이 된다. 이 바탕 위에서 우리는 주위의 형제와 자매, 나아가 전 피조물과도 친구가 된다.

 

 

3. 하느님의 백성은 순례하는 백성이다.

 

우리가 늘 같은 장소에 같은 성당에 나가고 있어도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모두는 순례하고 있다. 시간이라는 기차를 타고 순례를 하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의 컴퓨터를 생각해 보면, 무게도 모양도 크고 투박했는데, 요즘은 모양이 작아도 성능은 몇 배나 더 나아졌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교회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어 주신다. 이렇게 하느님은 각 시대에 알맞은 방법을 통하여 공동체를 만드시고 주관하신다. 우주 만물을 하느님 안에 일치시키고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해 가신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에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시나이 반도를 거쳐 선택된 백성을 순례의 길로 부르셨다.

 

순례의 길, 즉 떠나는 삶은 짐이 가벼워야 한다. 6·25나 1·4후퇴 때를 생각하면 처음에는 가재도구를 비롯하여 온갖 것을 다 들고 나왔다가 얼마 후에 하나씩 버리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아이들마저 버리고 가는 사람이 생겼다. 순례의 길을 떠날 때는 짐을 가볍게 해야 한다. 이것은 순례의 길이 바로 가난(청빈)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피정 지도를 하고 우연하게 코트를 한 벌 선물로 받았는데, 그것을 들고 다니느라 고생만 하다가 결국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주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부피가 큰 옷에 너무 욕심을 부려 고생만 하고,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되고 말았다. 정말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 가난의 두 종류에는 다음의 경우가 있다.

 

가. 물질적 가난

 

이 가난은 하느님께서도 배격하시는 가난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원이나 재원, 재물을 독점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많다. 이것은 정말 나눔으로써 극복해야 할 문제다.

 

나. 복음적 가난

 

이 가난은 물질을 귀하게 여기지만 결코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물질이냐 가난이냐, 이 둘이 갈등을 빚으면 먼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볼쇼이 아이스 발레’ 표를 선물 받았다. 곧이어 전통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표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두 공연이 같은 날에 열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느 쪽을 가겠는가? 아마도 더 좋아하는 쪽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추운 날 9일기도 참석에 대한 게으름이 생길 때 어떻게 할까, 망설여지겠지만 잘 극복하고 참여하게 될 것이다. 갈등을 뿌리치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눈앞에 이득이 생기는 물질이나 재화가 아니고 가난함을 택하는 것이 복음적 가난이다.

 

다. 헌신적 가난

 

자신의 삶 전체를 내어놓는 가난함을 택하는 것이다. 수도자들이 청빈을 택하여 자신의 소유물을 갖지 않고 서원을 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헌신적 가난이다.

 

순례의 길을 사는 우리에게 헌신적인 가난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복음적 가난을 살려고는 노력해야 한다. 창세기 12장 1절과 4절에서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라는 표현은 짐을 가볍게 한 순례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4. 하느님 백성은 공동체인 백성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한 인격과 같은 백성이다. 어떤 이는 눈의 역할, 어떤 이는 발의 역할, 어떤 이는 손의 역할을 통하여 여러 사람이 마치 한 사람의 모습으로, 한 인격으로 나타난다.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선교 200주년 행사와 그 후 열린 시성식에서도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보여 주었다. 이렇게 선교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한국주교회의에서는 이 사업을 성공리에 잘 마치기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를 해 왔다. 1984년이 ‘전국 일치의 해’였고, 1983년은 ‘교구 공동체의 해’, 1982년 ‘본당 공동체의 해’, 1981년은 ‘이웃 전교의 해’, 1980년은 ‘가정 공동체의 해’로 정해서 진행되었다. 본당과 가정 사이에 꼭 기억해야 할 과제로 이웃을 넣은 것은 참으로 깊은 배려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백성인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하느님의 백성은 처음부터 공동체로 불림을 받았다.

 

[월간 빛, 2002년 3월호, 정리 이용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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