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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교회사 공개대학5: 기해박해 순교성인의 생애와 활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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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08 ㅣ No.615

한국교회사연구소 상반기 공개대학 특강 지상중계 (5) 기해박해 순교성인의 생애와 활동


40~50대 교회 지도자 가장 많이 순교…70명 성인품에

 

 

신유년(1801년) 큰 박해 이후 30여 년 동안 조선 교회는 목자 없이 지냈다.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박해는 한동안 잠잠했고 조선 교회는 어려운 여건 속에도 나름대로 성장을 이어갔다. 전국 각 지역에서 많은 이방인이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신자들은 체포와 고문, 사형의 공포에도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한 운동을 지속해나갔다. 회장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벌였고, 교회 서적을 간행하는 등 신심회를 비롯한 여러 사업을 펴나갔다.

 

기해박해 순교성인의 새애와 활동에 대해 강의하는 최선혜 박사.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남이관(세바스티아노) 등이 조선 교회 상황과 함께 선교사를 청하는 서신을 북경과 남경, 마카오, 로마 교황청까지 보냈다. 이들 노력과 교황청 후원으로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립되고,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 앵베르 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들이 입국하게 된다.

 

신부들 입국으로 조선 교회는 새 전기를 맞았다. 당시 서울 신입 교우는 1000명이 넘었다. 앵베르 주교가 도착한 후 새 선교사 3명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만 1994명에 이르렀다. 6000여 명이던 신자는 이들이 도착한 후인 1838년 말에는 9000명에 이르게 됐다. 당시 한국의 인구를 따져볼 때 천주교 신자는 1000명당 1명꼴이었다.

 

 

1831년 조선대목구 설립

 

선교사들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신앙이 도전받는 것이었다. 붙잡힌 교우들은 고문에 시달리거나 배교했다. 선교사들은 신자들이 체포돼 죽음에 이르는 소식에 괴로워한 동시에, 배교한 신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곤란해 했다. 이들은 신자들이 겪는 괴로움을 위로하며, 꺼져가는 신앙의 열정을 뜨겁게 살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상황에도 프랑스 선교사들이 긴박하게 느낀 문제는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위험이 닥쳐올 때마다 그 필요성을 더 절감했다. 이미 모방 신부는 1836년 말 조선 학생 3명을 중국에 보냈다. 앵베르 주교도 3명의 소년을 준비시켰다. 그러나 이 때 기해박해라는 커다란 풍랑이 일었다.

 

기해박해의 발단은 벽파 풍양조씨가 시파인 안동김씨에게 정치 권력을 탈취하려는 것에서 비롯됐다. 1834년 헌종이 8살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했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오빠 김유근이었다. 이들을 대표하는 안동김씨 정권은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했다. 김유근은 유진길 권유로 1839년 세례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유근이 은퇴한 후 천주교를 적대시한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형조판서 조병헌에게 그간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 받은 이지연은 1839년 3월 천주교에 대한 강력한 대책을 건의했다. 천주교인은 아버지도, 임금도 없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을 따르는 역적이므로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사헌부 집의(종3품) 정기화도 호응해 천주교 근절을 위해 원흉을 잡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1839년(헌종 5년) 4월 18일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공식 반포됐고, 천주교 신자에 대한 대 탄압이 시작됐다.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 1840년대 말까지 계속됐다.

 

 

앵베르 주교 등 새남터 순교

 

교회 내부에는 김순성이 밀고자로 활약했다. 그는 교우라는 이름으로 각 모임에 참석하며 교우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면서 포도청에 가장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의 밀고로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가롤로), 조신철(가롤로),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며칠 사이로 속속 체포됐다. 앵베르 주교는 마을 피신처에서 이 모든 소식을 듣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교우촌 신자들을 찾아보게 했다.

 

같은 시기에 김순성은 포졸을 이끌고 수리산(현 경기도 안양)에 가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ㆍ이성례(마리아) 등을 체포했다. 김순성은 온갖 계략을 이용해 앵베르 주교 거처에 대해 정보를 수집했고, 결국 앵베르 주교는 8월 10일 포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앵베르 주교의 자수는 조정을 매우 놀라게 했다. 조정에서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체포할 것을 지시했다.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에게 피해가 더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 자수를 권고했다. 이에 두 신부는 9월 6일 충청도에서 자수, 서울로 압송됐다.

 

의금부에 국청이 설치되고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유진길, 정하상 등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심문을 받았다. 9월 21일 3명의 선교사는 군문효수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선교사를 이어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남이관, 김제준(김대건 신부 부친) 등이 처형됐다.

 

기해박해 초기인 1839년 5월 3일자 형조판서의 보고에 따르면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도는 모두 43명이다. 이 중 15명은 배교해 석방됐고, 나머지 28명은 감옥에 남아 있었다. 나머지 11명이 배교해 곧 석방될 예정이라고 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점은 박해가 시작되자, 신자들 앞에는 순교와 배교의 두 갈래길만이 놓이게 됐다는 것이다. 자세한 수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체포돼 고초를 겪거나, 신앙을 지키려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또 많은 이들이 배교를 택했다는 사실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현실적으로 순교는 죽음이고, 배교는 삶이었다. 그러나 순교가 사는 길이며 배교가 죽음이라는 확신이 있는 이들은 순교를 택했다.

 

훗날 기해박해로 순교한 신자 가운데 70명이 1984년 5월 6일에 시성돼 성인품에 올랐다. 이들 중에는 부부 성인도 있으며, 그 자녀 또는 형제ㆍ자매도 있다. 혈연 관계가 아니지만 신앙으로 가족처럼 공동생활을 한 분들도 있다. 회장이라는 직분을 맡은 이도 13명이나 있다. 가족은 배교했지만 홀로 순교한 사람, 고문을 이기지 못해 순간 배교했다가, 이를 철회하고 순교한 성인도 있다. 성별과 나이로 보면 남성은 27명, 여성은 43명으로 이 중 40~50대 교회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순교했다.

 

- 죄 지은 여자가 태장을 맞는 그림(19세기 말 화가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그렇다면 순교 성인들은 조선사회에서 실제로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

 

「정조실록」(1778)에 따르면 사형죄인에 대해 "옥사(獄事)를 다스림에 있어서 언옥 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고 또한 절옥(折獄)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으므로, 똑같은 사죄(死罪)인데도 참(斬)과 교(絞)의 구별이 있고, 또 대시(待時)와 부대시(不待時)의 구분이 있는 것이다.…당 나라 때부터 사형을 결단할 적에는 옥안(獄案)을 갖추어 기록해서 아뢰게 하고, 결단을 내릴 때 임하여 상복(詳覆)을 행하였으며, 형을 집행하는 날에 이르러서는 천자가 재계(齋戒)하고 소식(素食)을 먹으면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으니, 이는 백성들에게 불쌍히 여겨 슬퍼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본래 사형은 만물이 소생하는 춘분에서 추분까지의 시기를 피해 겨울에 형을 집행했다. 시기를 가리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 부대시는 대명율에 정해진 열 가지 큰 죄 - 십악대죄 : 모반(謀反), 모대역(謀大逆), 모반(謀叛), 악역(惡逆), 부도(不道), 대불경(大不敬), 불효(不孝), 불목(不睦), 불의(不義), 내란(內亂) - 를 저지른 죄인에 한해 적용했다. 조선시대 부대시는 대략 천건 이상이었고, 처형된 이들은 모반자, 민란의 우두머리, 존속살상, 궁궐에 관련된 죄인, 주인을 시해한 노비 등이었다.

 

 

기해일기 기록순교자 114명

 

조선후기에 편찬된 형벌에 관한 법전인『순혈법전』(欽恤典則)의 「五刑名義」(오형의 명칭과 정의)를 보면, 형벌은 '태형, 장형, 도형, 유형, 교수ㆍ참수형' 다섯 가지다. 교수형과 참수형은 형벌 중 최극형이다. 참수형은 목을 매는 교수형보다 훨씬 무거운 형벌로 턱 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집행했다.

 

곤장은 대략 선조(1552~1608)때부터 만들어져 사용됐다. 배를 젓는 노와 같이 길고 넓적한 형태다. 구한말 견문기에 따르면 불과 몇 대에 피가 맺히고, 십여 대에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곤장형 끝에 사망으로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순교자는 54명, 옥사나 장사 또는 병사한 신자가 60명이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참수된 신자가 70명 이상이다.

 

[평화신문, 2009년 4월 26일, 최선혜 박사, 정리=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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