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예화ㅣ우화

어느 청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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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 [korona] 쪽지 캡슐

1999-06-12 ㅣ No.40

어느 청년 이야기

1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귀여운 아기를 보면 빙긋 웃음이 나오고, 어쩌다가 맑게 갠 하늘에

무지개가 뜰 때면 그 끝에 정말 황금항아리가 있을까 궁금해하기도

하는.. 그 청년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뭐라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그래서 우리 주위에 있더라도 쉽게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런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의사선생님도 모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을 일어나지

못하고, 병을 앓던 그는 정확히 1년이 지난 어느날 기적처럼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이 청년은 자신이 보고들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2

이 청년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청년과는 달리

특별했습니다. 머리도 좋고, 성격도 좋고, 얼굴도 이뻐서 그녀 주위의 모든

남자들은 한번정도 그녀와 사귀는 것을 꿈꾸어 보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청년도 평범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기에

청년은 매일 밤을 새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의학, 공학, 지학, 농학, 법학,

경제학 등등의 모든 분야의 책을 읽었고, 읽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녀에 대한 모든 것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 그녀가 자주 가는 커피전문점, 그녀와 친한 친구들 이름,

심지어는 그녀가 한 모든 말들과 행동, 그리고 집에 갈 때 걸어가는 발걸음

수까지 전부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도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해 주는 청년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바람이 높게 솟은 나무 가지의 끝을 맴돌고 지나쳐간 날,

청년은 바람의 향기를 맡으며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그녀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3

그 날 이후로 청년은 행복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기억력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고,

그가 사랑하는 그녀 또한 그를 매우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청년은 설령 모든 것이 잊혀져도 이 시간만은 잊혀지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행복은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청년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기에 그녀가 속삭이는 달콤한 사랑의 말이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의

감촉들도 기억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가끔 행하는 실수나 그녀에게 가지는

작은 불만들 또한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러한

기억들은 자꾸 쌓이고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면서 청년은 점점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잃어간 채 그녀를 만나면 화를 냈고, 그녀 또한 변해가는 청년의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청년과 그녀는 헤어졌습니다. 그 날, 어스름지는 하늘 너머로

보이던 낮은 구름들도 헤어짐의 눈물과 함께 청년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4

그녀와 헤어진 이후, 그에겐 모든 일이 나쁘게만 돌아갔습니다. 그를 따르던

주위의 친구들도 자신의 모든 점을 기억하고 있는 청년을 짜증내며 떠나갔고,

청년은 단지 기억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청년도 혼란스러워 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젯밤 먹던 커피가

몇 방울이나 바닥에 흘렀는지, 오늘 아침에 차를 몇 대나 보았는지, 내일

만나기로 한 친구가 전에 만났을 때 술을 마시며 무슨 말을 했는지 모두 기억이

났기 때문에 이젠 그에게 새로운 것이란 없었습니다. 무엇이든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는 청년에게 변화라는 것은 단지 또 다른 기억거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 그런 과거에 얽매인 기억 때문에 그는 점점 자신을 과거에 얽매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5

청년은 이제 청년이 아닙니다. 나이를 먹어서 더이상 예전처럼 운동도 할 수

없고, 오랜 시간 걸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쌓인 모든 기억들 때문에

이젠 그는 밖에 나가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부모님의 돌아가실 때 모습과,

친구들이 자신을 떠날 때 남기고 간 차가운 눈빛들 하나하나를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그에게 세상은 잔인한 모습만을 기억시켜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누워 될 수 있는 대로 기억할 꺼리를 만들지 않으려는 그가

이제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옛날 그녀와 함께 보냈던 행복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기억하면서도 그 잘못을 되돌리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더이상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청년은 밖으로 뛰어나가 그가 그녀에게 처음

사랑을 고백했던 장소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엔 우연처럼 그녀가

하얀 머리를 이고 다소곳이 앉아있었습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6

청년은 예전에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기억하고 있는 예전 모습 그대로. 그녀와 함께 걸었던

길가의 가로등불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녀와 함께 보았던 영화의 대사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그녀와 함께 들었던 바이올린의 선율은 얼마나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는지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후,

모든 일이 나쁘게만 돌아가면서 그토록 원망해왔던 자신의 기억력을 얼마나

오랜만에 감사하게 여기고 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의 그런 이야기들을 모두 들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함께 살아 온 것처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함께 죽어갔습니다.

 

7

오늘도 바람은 또다시 차갑게 나뭇가지 끝을 스쳐갑니다. 어스름 지는

하늘가에도 낮은 구름이 맴돕니다. 이젠 어두워 진 하늘에 별이 뜨고,

어디선가 낮게 산의 파도소리가 낙엽들을 몰고 어디론가 떠납니다.

그리고, 청년의 묘비에 적힌 글들도 이젠 닳고닳아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기에 그는 슬펐고,

한가지를 잊지 않을 수 있었기에 그는 행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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