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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길옥윤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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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28 ㅣ No.105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5) 길옥윤 요셉 (상)


신혼여행 중 아내 패티 김과 총탄 쏟아지는 월남서 위문공연

 

 

파월 장병 위문공연 중인 패티 김과 길옥윤. 문화관광부 한국정책방송원 자료

 

 

60·70년대 히트곡 제조기

 

“빛과 그림자, 서울의 찬가, 이별, 하와이 연정, 사랑하는 당신이,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제3한강교, 감수광, 사랑이란 두 글자,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당신만을 사랑해, 진짜 진짜 좋아해, 사랑은 영원히, 사랑의 세레나데, 서울이여 언제까지나, 새벽비, 옛사랑의 돌담길”

 

이 노래들은 우리나라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대중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길옥윤(요셉, 1927-1995, 吉屋潤)이 대부분을 작사·작곡했다.

 

길옥윤은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영변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곳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의사였다. 길옥윤도 후에 경성치과전문학교(현 서울대 치대)를 나왔으니 3대가 의사 집안인 셈이다. 길옥윤은 작은아버지 댁에 양자로 들어갔다. 작은아버지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후에 국회의장을 지낸 김재순을 만났다. 김재순은 졸업할 때까지 늘 1등이었고, 길옥윤은 늘 2등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는 평양고등보통학교(평양고보)에 들어갔다.

 

 

평양고보 시절 문학과 음악 세계 매료

 

두 명의 교사가 길옥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 교사는 파우스트, 싯달타 등의 세계 명작을 빌려주며 길옥윤을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또 한 교사는 교련을 가르쳤는데 관악기를 잘 연주했다. 학교에는 브라스 밴드가 있었다. 여섯 명이 정원인데 한 명이 결원이었다. 그 교사는 그 자리에 길옥윤을 넣었다. 그래서 길옥윤은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수업을 마치면 대동강 강가나 만수대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평양고보를 졸업할 때 진로를 놓고 고민했다. 입학원서를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 광산전문학교, 경성치과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에 냈다. 그런데 네 곳 모두 합격했다. 결국 의사 집안의 맥을 잇기 위해 경성치전으로 결정했다.

 

치전 2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당시 학교는 서울 소공동에 있었다. 어느 날 밤에 미도파 백화점 근처를 지나다가 불이 환히 켜진 5층에서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음악 소리를 들었다. 그 음악에 매료되어 5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미군 장교 클럽이었다. 재즈가 연주되고 있었다. 밴드 마스터에게 간청해 악보를 얻었다. 그때부터 재즈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작은 아마추어 악단을 조직해 아르바이트했다. 경기고에서 피아노를 잘 쳤던 박춘석을 영입했고, 길옥윤은 색소폰을 불었다. 음악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전공을 치대에서 음대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치대로 돌아와 겨우 졸업했다. 겨우 졸업한 까닭은 음악 활동을 하느라 치아 100개를 뽑는 임상실습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었다.

 

6ㆍ25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길옥윤은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비는 소중히 아끼던 전자 기타를 팔아 마련했다. 소지품은 가죽 책가방과 그 안에 든 팝송 책 몇 권이 전부였다. 일본에 간 목적은 재즈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천신만고 끝에 작곡가 오자와 히데오(小澤秀夫)의 제자가 되었다. 오자와는 길옥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스승이었다. 제자에게 예명을 지어 주었다. 일본의 소설가 요시야 노보코(吉屋信子)와 준 이치로(谷崎潤一郞)의 이름에서 따온 ‘요시야 준’(吉屋潤)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이름은 최치성(본래 이름)이 아니라 ‘길옥윤’이 되었다. 오자와 악단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후 길옥윤은 독립해 자신의 밴드를 만들었다. 그의 이름이 일본 전역에 알려졌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 일본에서 활약하던 20대 때의 길옥윤. 출처=「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

 

 

서울시 후원 ‘서울의 찬가’ 만들어 대성공

 

길옥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서울의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세계 큰 도시에는 거기에 맞는 노래들이 있었다. 마침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현옥 서울시장이 길옥윤에게 서울을 상징할 수 있는 노래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길옥윤의 소망과 김현옥의 열정이 합쳐져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로 시작하는 ‘서울의 찬가’가 탄생했다. 노래는 패티 김이 불렀다. 서울시의 강력한 후원으로 ‘서울의 찬가’는 동네 스피커를 통해 수시로 나왔다. 라디오에서도 길거리에서도 흘러나왔다. ‘서울의 찬가’가 대성공을 거두자 2탄으로 ‘서울의 모정’도 작곡했다.

 

 

정미조 데뷔 시키려다 이대 학칙 때문에 무산

 

길옥윤은 서울예전(현 서울예대)에 교수로 출강했다. 출강한 학과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설된 실용음악이었다. 그런데 교수 임용에 어려움이 있었다. 서울대 치대를 나오고 경희대 대학원에서 치의학 석사 학위를 받았지만 정식으로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장애가 있었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준 사람이 국악과 학과장이었던 김희조였다. 당시 국악과에서는 교수 초빙 시 전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 사례를 적용한 것이었다. 학과가 초창기 때라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의 표현대로 ‘배부터 만들어서 사람을 구해 태우고, 거기에다가 사공도 태우고 기관도 싣고, 내가 선장이 되어 무작정 항구를 떠나는 항해’와 같았다. 실음과 초창기 교수진은 길옥윤, 최창권, 정성조였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로 구성되었다. 서울예전에서 거의 1년 동안 매주 11시간의 수업을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수업시간의 몇 배나 되는 연구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교재까지 만들어야 했다. 그런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겨 음악 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교수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길옥윤은 제자를 아끼고 사랑했다. 어떤 사람이 부산에서 가수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노래를 들어보니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가지 않고 매일 찾아왔다. 그래서 밴드 보이를 하라고 했다. 당시 가수 지망생들은 밴드 보이부터 시작했다. 밴드 보이는 악기를 나르고,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으로 간혹 기회가 생기면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그와 정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알고 보니 폐가 전부터 나빴다. 집에 돌아가서 병을 고치고 오라 했다. 나중에 길옥윤은 그에게 곡 하나를 선물해주었다. 또 이런 일화도 있다. 키가 아주 큰 이화여대 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기타를 들고 찾아왔다. 노래를 들어보니 잘 불렀다. 그래서 데뷔시키려고 했는데 학칙에 학생이 직업을 가지면 퇴학당하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결국 취입하지 못했다. 그는 홀로서기 해서 히트곡을 냈다. 그가 부른 대표적인 노래가 ‘개여울’이다. 그가 바로 가수 정미조이다.

 

- 서울 세종로공원에 세워진  ‘서울의 찬가’ 노래비.

 

 

일본서 패티 김과 첫 만남

 

패티 김을 처음 만난 곳은 일본이었다. 패티 김은 무용단과 함께 동경 국제극장에서 공연했다. 공연단을 인솔한 단장은 길옥윤과 친했다. 단장이 길옥윤에게 “목소리가 시원시원한 사람이 있으니 노래를 들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만났더니 실제로 목소리가 시원시원했고 행동도 세련되었다. 패티 김은 몇 가지 노래를 불렀고, 길옥윤은 몇 가지를 지적해주었다. 그것이 패티 김과 길옥윤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 길옥윤은 일본에서 벌인 사업이 망해 급히 서울로 왔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때 다시 패티 김을 만났다. 지구레코드사에서 패티 김의 노래를 녹음하기로 했고 길옥윤은 편곡을 맡았다. 패티 김을 다시 만나니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길옥윤이 여관방에 홀로 누웠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처지가 처량했다. 갑자기 악상이 떠올랐다. 미친 듯이 곡을 썼다. 그 노래가 ‘4월이 가면’이었다. 길옥윤은 한밤중에 패티 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그 곡을 들려주었다. 길옥윤은 패티 김이 절망에 빠진 자신을 구원해줄 빛이라 생각했다. 패티 김과 함께 전방부대 위문공연을 갔다. 두 사람은 꼭 붙어 다녔다. 공연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차 사고가 났다. 탑승한 사람 중에 죽은 사람도 있었다. 자신들도 희생자가 될 뻔한 것을 알고 깊이 안도했다.

 

그해 두 사람은 결혼했다. 주례는 공화당 의장이었던 김종필이 섰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 중에 월남으로 갔다. 자진해서 파월장병들을 위문하러 간 것이었다. 그곳에서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최명신 장군을 만났다. 헬기를 타고 총탄이 쏟아지는 고지를 찾아갔다. 악기는 기타뿐이었다. 죽음과 마주한 최전방의 병사들 모습은 실로 처절하고 눈물겨웠다. 부부는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래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1월 26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6) 길옥윤 요셉 (하)


직접 지은 노래 ‘이별’ 처럼 아내와 헤어지고 성가 작곡에 혼신

 

 

행복했던 시절 길옥윤 부부. 출처=「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

 

 

길옥윤(요셉, 1927-1995, 吉屋潤)과 패티 김은 안정적인 결혼생활 덕에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었다. 만드는 노래마다 히트했다. 두 사람은 1년 예정의 세계 여행을 떠났다. 6개월 후에 패티 김은 서울로 돌아왔고, 길옥윤은 재즈를 더 공부하려고 미국 뉴욕으로 갔다. 그곳 맨해튼음악학교에서 재즈를 공부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계 여행은 두 사람을 갈라놓은 여행이 되고 말았다. 패티 김이 서울로 떠난 다음 하와이에 홀로 남은 길옥윤은 달이 뜬 바닷가를 바라보며 곡을 떠올렸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사랑이란 즐겁게 왔다가 슬프게 가는 것/ 훌라춤에 흥겹던 기쁨도 모래알에 새겨진 사연도…’라고 부르는 ‘하와이 연정’을 만들었다. 노래 가사에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담았다. 이 노래는 패티 김이 불러 대히트했다. 어느 날 밤에는 술에 취해 창가에 앉아 달을 바라보다가 악상이 떠올랐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으로 시작하는 ‘이별’이란 곡이다. 이 노래도 패티 김이 불러 크게 히트했다. 길옥윤은 자신이 만든 노래가 자신의 운명에 적중하는 것을 늘 느끼곤 했다. 특히 ‘이별’을 썼을 때, 패티 김과 이별할 것을 예감했고, 그것은 바로 현실이 되었다. 길옥윤은 패티 김과 헤어지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세계가요제에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 약속은 지켜졌다. ‘봄날에는 꽃안개/ 아름다운 꿈속에서/ 처음 그대를 만났네’로 시작하는 ‘사랑은 영원히’가 동경 국제가요제에서 자랑스럽게도 동상을 받았다.

 

 

두 사람 갈라놓은 세계 여행

 

길옥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고향 평안도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어머니는 선교사 밑에서 교육받은 신심 깊은 신자였다. 가족 모두가 교회에 나갔다. 집에는 피아노가 있어 주일에는 집에서 부흥회도 열었다. 그런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기에 교회에 꼭 나갔고, 합창단에서도 활동했다. 그 후의 신앙생활은 독실하지 못했다. 오로지 노래를 만들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길옥윤에게 신앙이 우연히 찾아왔다. 우연이라기보다는 운명이었다.

 

길옥윤의 오래된 일본인 팬이 있었는데 그는 길옥윤에게 한국말을 배우고 일이 있을 때 도와주곤 했다. 길옥윤의 딸 안리는 그를 ‘작은 아빠’라 불렀다. 그는 한국 여성과 사귀었다. 그 여성이 천주교 신자였다. 그 남자는 3년 동안 한국 성당에 나가면서 교리 공부를 했다. 그러고는 성탄절에 성마리아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길옥윤도 그 미사에 참여해 축하해주었다. 그 전에 그는 길옥윤의 딸 안리에게 자신이 다니는 성당에 한번 가자고 제안했다. 안리는 물론 길옥윤 내외까지 같이 갔다. 그리하여 길옥윤이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갔던 성당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갔다. 그 후 주일마다 성당에 갔다. 그러고는 예비신자교리반에 들어가 1년 동안 교리 공부를 했다. 성경 공부도 하고 성가대의 피아노 반주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이렇게 해서 길옥윤은 일본에서 ‘요한’으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길옥윤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하나는 성당에 나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가집을 내는 것이었다. 한 가지 약속은 이행했다.

 

- 작곡노트 중 한 알의 겨자씨. 출처=「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

 

 

어머니와 ‘천주교 신자 되기 · 성가집 내기’ 약속

 

길옥윤은 방송국 드라마 주제곡 작곡 때문에 우리나라를 잠깐 방문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가 며칠 안 되어 쓰러졌다. 그는 건강했었다. 30여 년 동안 매일 체육관에서 운동하며 체력을 관리했다. 운동하지 않으면 몸이 빨리 늙고, 음악 활동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건강했던 몸에 악성 암이 쳐들어 들어온 것이다. 길옥윤은 구급차를 타고 갔다. 그는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병원에서는 모든 의료기기를 동원해 진단했다. 뢴트겐을 100여 장이나 찍었고, CT를 비롯해 초음파 검사를 했다. 결과는 폐에 있던 결핵균이 척추로 옮겨와 척추에 종양이 생긴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동경여의대 부속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했다. 그 병원에서 반년 이상을 혹독하게 병마와 싸웠다.

 

 

다섯 시간 암 수술…수술실에서 나온 ‘새로운 나’

 

암 수술을 했다. 수술 전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좋은 노래로 더욱 기쁜 찬양을 드리며 살게 해주십시오. 성모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수술은 장장 다섯 시간이나 걸렸다. 길옥윤은 그 다섯 시간을 ‘5백억 광년’의 시간이라 했다. ‘과거의 나’는 수술실에 들어가 죽었고, 수술실에서 나온 사람은 ‘새로운 나’라고 여겼다. 이제부터 오로지 사랑이 담긴 음악만을 만들고, 진실이 담긴 얘기만 하고, 쓸데없는 사람은 만나지 말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시간은 오직 음악과 예술과 찬양을 위해서만 쓸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 사랑하는 딸 정아와 함께. 출처=「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

 

 

그래서 최우선으로 둔 것이 성가 작곡이었다. 길옥윤을 영적으로 지도해준 신부도 늘 “길옥윤이 만든 성모송이나 주님의 기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길옥윤은 그동안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곡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거룩한 교회 음악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가톨릭 음악을 ‘제일 큰 사랑의 노래’, ‘제일 깊은 사랑의 노래’, ‘영원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병상에 누워 미사를 생각했다. 성경에 하느님 나라를 한 알의 겨자씨에 비유한 말씀이 있다. 길옥윤은 그 말씀을 깊이 묵상했다. 그랬더니 영감이 떠올랐다. 그래서 급히 작곡 노트에 곡을 써나갔다. 성가 제목은 ‘한 알의 겨자씨’였다. 가사는 “뿌려진 씨앗은/ 어느덧 싹트고/ 이삭이 되고/ 낟알이 맺힌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견주나/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비유하나/ 그것은/ 한 알의 겨자씨 같아/ 보잘것 없어도/ 조그만 씨앗은/ 자라고 뻗어서/ 드높은 하늘로/ 가지를 뻗치네/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게 되리라”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길옥윤 복음 성가’ 앨범 한 권이 만들어졌다. 앨범에는 아름다운 성가 14곡이 담겼다. ‘한 알의 겨자씨’를 비롯해 ‘길 되신 예수’, ‘나는 거닐리라’, ‘나는 순례자’, ‘믿음’, ‘보이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 ‘소망’, ‘시간은 자꾸 가는데’, ‘영원한 삶’, ‘외쳐보아요’,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 ‘주님’이었다. 노래는 이기헌 주교, 김영자 수녀, 최희준(티모테오), 탤런트 김희애(마리아), 진성만, 정경화가 불렀다. 이 앨범은 최희준이 주도했고, 영화인 김지미(체칠리아)가 제작비를 지원했다. 길옥윤은 이렇게 해서 성가집을 만들겠다는 어머니와의 두 번째 약속을 지켰다.

 

 

7개월 투병 기록 카세트 테이프에 담아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처음으로 샤워했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마치 나치 감옥에 있던 유다인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뼈하고 가죽만 남은 몸이었다. 길옥윤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는 이제껏 자신이 걸어온 삶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해 5월부터 12월까지의 투병 기록을 20여 개 카세트 테이프에 담았다. 그 안에는 고통스러웠던 투병 과정을 비롯해 과거의 화려했던 삶, 힘들었던 삶, 그리고 지우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던 삶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또한 마지막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성가를 작곡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도 담았다. 이렇게 기록한 것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책 제목은 「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 없다」로 ‘길옥윤 참회록’이란 작은 제목을 달았다.

 

결국 길옥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식장에서 입관 예절을 끝내고는 관에 소중히 아끼던 묵주와 색소폰을 넣어주었다. 장례 미사는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봉헌되었다. 영결식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거행되었다. 최희준이 사회를 보았고 패티 김이 조가(弔歌)로 ‘서울의 찬가’를 불렀다. 그리고 연예인 색소폰 연주자 50여 명이 관을 운구했다.

 

참고 자료 : ▲ 길옥윤 「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 조선일보사. 1995 ▲ 임진모 「유행가 3·6·5」 스코어. 2022 ▲ 가톨릭신문(1995.3.26.) ‘길옥윤 씨 추모 행사 마련’ ▲ 가톨릭신문(1996.2.4) ‘길옥윤 유작 성가집 「햇빛」’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2월 3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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