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5일 (토)
(자)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교육ㅣ심리ㅣ상담

[상담] 별별 이야기: 판단할 수 있는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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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14 ㅣ No.1010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1) 판단할 수 있는가 없는가 (상)

 

 

어제 함께 사는 신부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신부님이 자기 동창이 신학교 면접 볼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한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 동창이 신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른 후 면접을 볼 때의 일이다. 면접관 신부님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자네는 어떻게 신학교를 오게 됐나?” 그러자 그 동창은 이렇게 대답했다. “안양에서 전철 타고 수원역으로 와서 수원역에서 ○○번 버스 타고 왔습니다.”

 

함께 식사하던 신부님들이 배꼽을 잡으며 박장대소를 하던 차에, 그 옆에 계신 신부님도 이에 질세라 한마디 거들었다. 자신도 신학교에서 어떤 교수 신부님의 질문에 잘못 대답을 해서 큰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였다. 이 신부님이 어느 날 강의를 하시는 신부님의 말씀이 너무 자장가처럼 들려서 정신없이 졸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교수 신부님이 졸고 있는 자신 앞으로 다가와서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언성을 높이면서) 자네 어젯밤에 도대체 뭐했나?” 그랬더니 깜짝 놀라 잠이 깬 신학생은 엉겁결에 눈을 껌뻑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잠잤는데요!!!”

 

이 대답이 어찌나 웃기던지 교실은 그야말로 웃음바다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이 상황이 웃기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질문을 던진 교수 신부님이었다. 자신의 말에 농을 섞어 말한 신학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하셨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이 신학생은 말 그대로 교수 신부님에게 찍혀서 신학교 생활이 고달팠다고 한다.

 

거의 이런 실수는 대화의 내용이 어떤 배경에서 생겨났는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잘~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어투나 음색이 비꼬는 듯하거나 잘못이나 실수를 한 상황에서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오히려 반대의 의미가 된다. 면접 상황에서 어떻게 신학교를 왔느냐는 질문은 신학교에 뭐 타고 왔느냐란 질문이 아니라 어떤 동기로 신학교에 지원했느냐는 말이었다. 수업시간에 졸고 있었던 상황에서 어젯밤 뭐했느냐는 질문은 밤에 무슨 일을 했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졸지 말라는 훈육의 말이었다.

 

우리는 종종 멀쩡한 상황에서 동문서답을 한다든지, 혹은 상황에 맞지 않은 의사소통으로 주변을 당황하게 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상대의 말에 대한 배경과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말은 그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만 비로소 온전히 이해되는 속성이 있다. 즉 말의 진정한 의미는 그 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배경과 상황의 상호작용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면교류는 말 자체보다는 그 말이 어떤 배경과 상황에서 발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진정한 소통은 대화가 발생한 배경과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굳이 의사소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행동도 결국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즉 진정으로 한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이 발생한 배경과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정언적 말씀이 아니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4월 26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2) 판단할 수 있는가 없는가 (중)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남을 판단할 자격이나 권한이 없음을 의미하기 이전에 우리가 남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떤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이 일어난 상황과 배경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한다. 상황과 배경이란 인간의 기질, 성격, 동기, 욕구, 의지, 그리고 가치관 등과 같은 심리 내적 요인들과 어디서 태어나 어떤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삶의 경험을 공유해 왔는지에 대한 사회문화적 요인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상황과 배경을 모두 이해한 후에 어떤 사람의 행동을 평가할 수 있는 통찰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자신만의 관점(터널비전)으로 타인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온전한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최소한의 판단을 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판단을 통한 죄를 최소화할 수 있다. 게다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내리는 인간의 겸손한 판단은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를 이 세상에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삶을 사는 분들이 있다. 바로 남을 판단하는 일이 소명인 판사들이다.

 

우리나라 법관들은 가장 존경하는 판사로 고(故) 김홍섭(바오로, 1915~1965) 판사를 꼽았다. 평생 사랑과 청빈의 삶을 살았고 특히 사형수와 수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사도법관(師徒法官)’으로 불리는 분이다.

 

김 판사는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끔찍한 사건의 피고인을 앞에 놓고 자식에게 타이르듯 온갖 정성을 다해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선고하는 날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어느 편이 죄인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그 점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하고 형을 선고하였다.

 

김 판사는 선고를 내린 후 며칠 지난 다음 교도소로 이들을 찾아가 직책상 달리할 수 없어 판결을 내렸지만, 심히 미안한 일이라며 양해를 빌고 나서 가톨릭 신자가 되기를 권했다. 이렇게 하여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김홍섭 판사는 판사로서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 있는 공식적인 직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법리와 증거를 통해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도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누가 죄인인지를 알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고 있었다. 게다가 직책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면서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고인들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만 판단하지 않고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과 배경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김 판사의 마음을 통해 회심을 결심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행동 이면에 숨어 있는 상황과 배경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인간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할 수 있다. 인간의 겸손한 판단이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사법권 남용의 오명을 쓰고 사법부 권위가 실추되고 있는 요즘에도 김홍섭 판사와 같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는 법관들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3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3) 판단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

 

 

2019년 12월 초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된 30대 청년 2명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따듯한 위로와 배려를 했던 박○○ 부장판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재판장인 울산지방법원 박 판사는 “스스로 생을 포기하려고 했던 깊은 고뇌와 참담한 심정을 우리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느냐”며 “지금보다 더 좋은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니 살아달라”고 호소했다. 박 판사는 “우주가 도서관이라면 우리는 모두 한 권의 책”이라고 비유하면서 “한번 시작된 이야기가 도중에 허망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이들이 써 나갈 다음 이야기를 우리 모두가 궁금해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동반 자살을 시도한 두 청년은 자살방조죄로 각각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려 했던 박 판사의 배려가 두 청년으로 하여금 다시 세상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선사했을 것이다. 재판부는 자살방조에 대한 죄 자체를 판단할 뿐이지 그 상황까지 이르게 된 두 청년의 삶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생을 포기하려는 깊은 고뇌와 참담한 심정을 우리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는 판결문을 통해 이들 삶의 배경과 상황을 깊이 공감하려는 박 판사의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 순간 두 청년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판단을 받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인간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분명 체험했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상황과 배경을 모두 고려한 온전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치 못한 상황에서 누구를 판단해야 할 상황이라면,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한다. 최대한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면서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판단을 내리려는 우리의 노력은 비록 판단의 잘못을 저지르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판단을 한다. 우리의 판단은 결국 타인에게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도 고통을 안겨준다. 하지만 타인의 행동이나 어떤 현상 이면에 숨어 있는 배경과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우리는 판단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적어도 그 배경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는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無知의 知)은 판단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죄악과 해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방식으로 판단을 내리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자신이 내린 판단을 스스로 너무나 쉽게 믿으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확증적 편향). 따라서 판단하는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판단에 앞서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혹은 “적어도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다” 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라는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고 그 결과 이 덕을 기쁘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10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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