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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聖 모방 베드로 신부(1804~1839)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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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규 [choyeung] 쪽지 캡슐

2019-04-29 ㅣ No.630

 

□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聖 모방 신부(Maubant 나백다록 베드로 1804~1839)

프랑스 바시(Vassy)에서 태어나 1829년 5월 13일 신부가 되었다. 잠시 교구에서 보좌신부 생활을 한 후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3월 중국 사천(四川) 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서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나 조선 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하고 조선에 입국하고자 복건성(福建省), 북경(北京) 등을 거쳐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이르렀다.

 

 

삼성산성당에 모셔진 세 성인의 연필화

 

그곳의 교우촌에서 1년간 머무르며 한문공부를 하였고 1835년 10월 20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하자, 이미 그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필요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바 있는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한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렀다. 조선국경에 이르러 조선 교우들을 만나 1836년초 입국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가 되었다.

 

모방 신부는 조선말을 공부하면서 성사를 집전해야 했고 부활절을 서울에서 지내고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고 200여명에게 영세를 주었다. 또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서두르고 이미 이 해에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의 경리부로 보냈다.

 

□ 1837년 샤스탕(Chastan, 鄭) 신부를 맞아 그와 함께 남은 공소들을 방문하였다.

 

새 공소를 세우고 공소회장을 세우는 등 교우들에게 필요한 지침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 1837년 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입국하게 되어 조선교회는 이제 필요한 교회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또 교세도 급속히 신장되어 그의 입국 당시 4천 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1837년 말 8천 명으로 급증하였다.

 

삼성산성지에 위치한 세 성인의 묘비

 

그러나 1839년 큰 박해, 즉 기해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이미 체포된 앵베르 주교는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게 자헌(自獻)할 것을 권고하였고, 두 신부는 자헌을 결심하고 9월 6일 홍주(洪州) 근처에서 대기중인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모방 신부는 여러 차례 신문과 고문을 받고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와 같이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관(榮冠)을 차지하였다. 

 

그의 시체는 20여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는 것을 교우들이 거두어 노고산(老姑山)에 1839년부터 1843년까지 안치되었다, 1843년에는 과천(果川)땅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졌고 58년간 이곳에 안치되었다. 1901년 시복수속이 진행됨에 따라 명동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 모방 신부는 앵베르 주교 등과 함께 1857년 가경자(可敬者)가 되었고, 1925년에는 복자가 되었으며,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102위와 더불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 조선의 감옥에서 성 모방 신부의 자백내용

 

죄인 나 베드로는 사뢰오. 저는 구라파 사람으로서, 먼 나라에 성교(聖敎)를 전하고자 1835년 겨울에 1만 리의 먼길을 멀다 하지 않고 조선에 들어와 처음에는 서울의 정하상 집에 머무르고 뒤에는 지방의 몇 군데로 돌아 다녔소이다. 

 

 

 

본디 성교는 남을 속이지 못하고 사람의 이익을 꾀하는 것으로 되어 있사와 저를 안내하여 준 사람들의 이름을 고해 바치면 그 사람에게 해를 미치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고 비록 죽는다 하여도 그를 댈 수는 없사오이다. 이 나라에 들어와서 성교를 가르치어 도처에서 교우를 얻게 되었사오나, 그들의 성명을 잘 기억하고 있지 않소이다. 

 

 

 

그리고 산과 냇물과 길의 이름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서 어느 지방 어느 마을에 있었다고 가르칠 수도 없소이다. 돈은 전교회로부터 통역관(유진길)에게로 보내 주어서 그것으로 의복을 구하였소이다. 조씨(신철)가 나와 같이 들어왔다고 자백하였으니까 나로서는 별로 말할 것이 없소이다.

 

<성 모방 신부의 초상화, 15P, Oil on canvas,2011년 >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모방 신부는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9월 7일, 9일 양일에 걸쳐 포청에서 신문을 받고, 10일 의금부로 옮겨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과 함께 추국(推鞫)을 받았다. 여기서 신장 11대 그리고 며칠 후에는 13대를 맞고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는 35세이며 조선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모방 성인 유해는 지금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참고원문 : http://blog.daum.net/choyeungart/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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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 모방 베드로 신부(1804~1839), 성인 초상화, 기해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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