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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레지오 단원은 악습을 극복하기 위해 고해성사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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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02 ㅣ No.567

[레지오 영성] 레지오 단원은 악습을 극복하기 위해 고해성사를 사랑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원죄가 자리해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원죄로부터 인간 본성의 무질서가 일어나고 그 무질서로 인해서 다양한 나쁜 경향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원죄는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도록, 타인에게 무관심하도록 이끄는 경향이 강합니다.

 

세상이 남성은 육과 눈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여 쉬이 죄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보편적 시각을 갖게 된 이유일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자매님들이 우쭐해 하시는데요. 그릇된 우월감은 아닙니다. 가톨릭 신자 수에서 여자 신자 분들이 훨씬 많은 것만 봐도 남성보다 여성이 우월한 믿음감각을 가졌다는 증거가 되니까요.(레지오 단원의 수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1요한 2,16)이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육의 욕망”, “눈의 욕망”,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을 잘라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이야말로 믿음을 살아가는 우리 자매님들을 향한 묵직한 경고라고 생각되는데요. 살림살이에 대한 작은 자만마저도 세상 욕망에 붙들린 모습임을 각성하게 하니까요. 저는 살림에는 젬병이라 잘 지적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만 살림의 고수이신 자매님들께서는 그 죄 된 욕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쉬이 헤아리실 줄 믿습니다.

 

사실 모든 악습은 양심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 그렇게 참된 것을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참된 것을 즉각 따르기보다 갖은 구실을 찾아서 돌아가려는 습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정의에 관하여, 사랑에 관하여, 용서에 관하여 이런저런 구실을 끊임없이 찾아내어 핑계를 대며 미루기 일쑤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모습은 우리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1베드 5,8)처럼 우리를 삼키려 들어도 무방비한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 버리는 행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악습은 반복되는 습관의 열매, 나쁜 습관은 씨부터 말려야

 

그런 의미에서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님이 레지오 단원들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치명적 악습 일곱 가지를 제시한 것에 집중하게 되는데요. 교황님은 교만, 시기, 분노, 탐욕, 색욕, 식탐, 나태 일곱 가지를 ‘우두머리격의(capitalia) 악습’이라 칭했습니다. 이 악습이야말로 모든 악습들의 머리(caput)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우두머리격의 악습들이 그 자체로는 대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탐을 대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에 경계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한 일곱 가지 악습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데요. 자신의 색욕을 채우기 위해 훔치고, 죽이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쉬이 이해가 되실 겁니다. 결국 똑부러지게 교만하기만 할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거나 시기심이 많을 뿐 화를 내지 않기는 어렵다는 얘깁니다. 우리의 악한 습관은 단 한 가지에 의해서 다른 것들로 번져가는 전염병 같다는 것을 생각하면 악습의 밀접한 관계를 허술히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악습으로 규정하던 사항들이 현대에서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인데요. 예를 들어 식탐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먹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세상은 맛집들을 멋지게 소개합니다. 절제되지 않는 성에 대한 자유로움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오해하게 하는 문화가 힘을 떨치는 중입니다. 나아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것이 적극적인 삶의 모습인 것처럼 우리를 유도하지요. 결국 전통적인 식탐, 색욕, 교만, 시기의 구분을 흐리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죄와 악습의 차이에 민감할 필요가 생긴 셈입니다.

 

악습을 흔히 식물에 비교하는데요. 식물은 물을 주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악습 역시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부들이 “죄는 바로 악습의 징후이며 열매들이다”라고 설명하는 이유이지요. 악습은 반복되는 습관의 열매이기에 나쁜 습관은 씨부터 말려 죽여야만 한다는 뜻이고 그 열매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미진하기에 온 힘을 다해서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의 무능력자로 만드는 괴물입니다.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귀하게 여긴 결과가 곧 죄입니다. 그럼에도 악의 경향에 타협하고 악에 휩쓸려 살아가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 나약한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 그리고 성사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유혹에 걸려들었다면 주저 없이 고해소로 직행해야

 

주님의 법은 명료합니다. 그 법은 이웃을 ‘언제나 사랑할 것’과 이웃에게 ‘늘 양보하고 희생할 것’과 주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 뿐입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경우 미처 죄인 줄 인식하지 못한 채 죄에 빠지는지요? 그분 말씀과 계명이 송이 꿀처럼 달콤한 것을 알면서도 죄의 유혹에 시달리는지요? 성사의 은총마저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살곤 하는지요?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내 뜻으로 죄를 궁리하는 생각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유혹 자체에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죄는 ‘내 스스로’ 저지르며 내 결정에 따라 짓게 된다는 것을 유념하면 좋겠습니다. 삶이 상황과 처지를 막론하고 죄와의 타협은 결단코 나 자신의 선택이라는 점을 명심합시다. 죄에 관대할 때, 죄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세상의 어느 죄도 내 허락 없이는 결코 나를 넘어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깨어 지냅시다.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순전히 유혹에 손을 내밀어 동조하는 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통상 일반 신자들이 성인으로 도약하는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작은 유혹에 스스로 타협하여 서서히 더 큰 유혹을 받아들이는 탓입니다. 이야말로 죄에 둔감해지는 비결임을 잊지 맙시다.

 

사탄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사탄의 특기는 핑계를 대기 위해 궁리하는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와 자리 잡는 뻔뻔함입니다. 유혹을 떨쳐내는 가장 탁월한 비결은 사탄의 유혹이라 싶을 때 ‘무조건’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피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유혹에 걸려들었다면 주저하지 말고 고해소로 직행합시다. 그래서 삶 안에서 유혹과의 단절을 선언합시다. 나약한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현명한 하느님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작전이며 최선의 선택입니다.

 

우리에게는 사탄보다 훨씬 힘센 주님 사랑이 대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부했던 걸음을 되돌려 암흑과 거짓으로부터 탈출하는 비법을 거푸거푸 사용할 수 있는 축복을 외면하지 맙시다. “털어만 놓으라……”고 기다리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 막지 맙시다. 레지오 단원이기에 성심껏 정기적으로 고해소를 찾고, 성사로 축복을 누리는 열성으로 더욱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도약해야 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4월호,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부산교구 사목국장, 부산 R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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