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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배움, 가르침 그리고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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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25 ㅣ No.346

[수도원 뜨락에서] 배움, 가르침 그리고 모름

 

 

가을 하늘이 그야말로 공활하니, 말 그대로 텅 비고 매우 넓다. 우러러보며 절로 깊은 숨을 쉬게 된다. 청량한 하늘 아래 책 읽는 즐거움도 덩달아 맑고 깊어진다. 근래 배움과 가르침에 관한 현자들의 글 몇 줄이 마음에 깊이 와닿아 나누고 싶다. 중세 특출한 스승이었던 생 빅토르의 후고(1096-1141년)부터 시작해 보자.

 

 

배움 

 

“철학하는 이에게는 온 세상이 망명지다. 아직 고향에 정을 품은 이는 섬약하다. 도처를 제 고향으로 여기는 이는 강건하다. 온 세상을 망명지로 느끼는 이는 완전하다. 첫째는 자기 사랑을 한 장소에 묶었고, 둘째는 그 사랑을 온 세상에 흩었으며, 셋째는 그 사랑을 소멸시켜 버렸다”( 「학습론」 [Didascalicon], III, 19).

 

여기서 ‘철학하는 이’는 철학 전문가가 아니다. 고대와 중세에 철학은 수행 또는 구도와 동의어였다. 진정한 독서 곧 배움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나그네의 외로움이라는 게 발언의 요지다. 그러나 후고는 객수(客愁)의 ‘낭만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그의 말에 메아리치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이 지상에서 ‘이방인이요 나그네’로 알아들었던(1베드 1,17; 2,11 참조)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자의식이다.

 

후고는 배움의 길을 걷는 이에게 세 가지 수준이 있다고 본다. 초보자는 아직 고향(조국)에 애착하는 이다. 그의 배움은 취약하다. 낯선 것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이 이해력을 원천에서부터 좀먹기 때문이다. 이보다 좀 나은 것이 온 세상을 고향처럼 여기는 단계다. 고향에 대한 사랑을 온 세상으로 넓힐 때 배움은 비로소 튼튼히 익어 간다. 그러나 완전한 배움은 온 세상을 낯선 망명지처럼 여기는 단계다. 여기서는 정체성의 근원이 되는 모든 소속(혈연, 지연 등)이 그 특유의 배타적 애착과 함께 소멸된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이반 일리치(1926-2002년)는 이렇게 토를 달았다. “읽는 이는 모든 관심과 욕망을 지혜에 집중하고자 스스로 망명자가 된다. 그리하여 지혜가 그의 고향이 된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변방으로 나가라.”는 초대를 반복하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변방에는 작고 가난한 이들이 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은 복음의 가장 뛰어난 수용자들이다”(베네딕토 16세 교황).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변두리 인생들을 한결같이 편애하시는 이유가 다 있다. ‘가난한 이들의 해석학적 특권’이란 말도 이래서 나왔다.

 

 

가르침

 

“아는 것을 가르치는 시절이 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시절이 온다. 그러다가 마침내, 배운 것을 내려놓는 시기가 도래한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1915-1980년)가 만년에 명문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 취임 강의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가 이제 가르침의 마지막 단계, 곧 배운 것을 내려놓는 단계에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혜’(Sapientia)라는 오래된 말이야말로 이 단계를 가장 잘 설명한다고 하면서 지혜의 조건을 이렇게 묘사한다. “권력은 한 톨도 없고, 지식과 슬기는 약간, ‘맛’[味]은 맘껏 풍성하고 깊게.”

 

한 세속 학자의 입에서 나온 이런 말은, 학문과 영성의 접점을 잘 보여 준다. 지혜의 라틴어 ‘사피엔시아’(Sapientia)가 ‘맛보다’(sapere)란 동사에서 나왔음을 생각하면 알아듣기가 좀 쉬워진다. 지혜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체험과 관련이 있다. 「논어」 식으로는,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 나아가 ‘즐기는 것’과 더 관련이 있다. 곧 ‘옹야’ 편에 따르면,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꿀보다 입에 달다.’(시편 119,103 참조)는 식의 표현은 성경에도 차고 넘친다. 이런 지혜는 필경 ‘사랑’이나 그 체험과 다르지 않다.

 

지혜로운 이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다 그러하듯, 힘이나 권력을 부리기는커녕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어리석고 무력한 하느님의 지혜’(1코린 1,18-29 참조)도 앎(Gnosis) 또는 지혜에 관한 성경 전통의 이런 맥락에 있다.

 

후고에게, 지혜를 찾는 이가 읽어야 할 궁극의 책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뒷날 보나벤투라 성인(1218-1274년)은 한 설교에서 후고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으며 덧붙인다. “이 책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열린다.”

 

 

모름

 

앎과 가르침의 궁극이 실상은 ‘모름’에 있다는 것도 예나 이제나 그리스도교 안팎의 현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바다. 그 가운데 “성인은 배우지 않음을 배운다.”(學不學, 「도덕경」, 64)는 오래 묵은 말씀이 통렬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의 질서 정연한 말과 지식은 세상을 알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낯선 곳에서 손에 쥔 지도처럼. 배움과 가르침의 여정에서 우리는 이 지도의 마력에 심취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을 곱씹으면서. 그러나 지혜를 향해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이는 조만간 깨닫는다. 제가 길들인 말들과 그려 놓은 지도가 아무 쓸모가 없단 사실을 말이다.

 

니코데모처럼 그만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을 마주하게 된다. 곧 말씀이 솟아나는 저 궁극의 원천 앞에 서게 된다(요한 3,1-8 참조). 거기서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그곳은 자기가 알던 세상의 끝이다. 그래서 여태 모르던 새 세상의 시작이다. 여기서는 단지 조용히 기다리며 문을 두드릴 수 있을 따름이다. 사실은 이게 ‘들음’이다. 이 ‘들음’에는 ‘어린이처럼 되는 것’만이 도움이 된다. 어린이처럼, 다시 모르게 되는 것…. 그래야 예측할 수 없는 저 바람, 곧 성령의 기운을 타고 함께 흐르게 된다. 그래야 참지혜를 깨닫고 하느님 나라에 입문하게 된다.

 

이 가을, 지혜를 향한 여정에서 ‘무지’의 이 정화는 ‘무위’(無爲)로 직통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글도 만나 기뻤다. 최근 나온 「마오와 나의 피아노」(배성옥 역)는 빼어난 중국 피아니스트(주 샤오메이)의 감동적인 자서전이다. “작곡자 뒤로 사라지는 연주자의 연주야말로 최고의 연주”라고 말한 대목에 나는 오래 머물렀다.

 

다른 저자의 비슷한 말도 함께 떠올랐다. “눈앞의 관객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연주자의 의무지만, 그의 마음은 ‘지상에서 아득히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음(音)’ 쪽으로 더 향해 있어야 한다”(서경식, 「시대를 건너는 법」).

 

신자가 아닌 분들의 음성이다. 그러나 복음을 늘 배우고 가르쳐야 할 ‘말씀의 연주자’인 우리에게 어쩌면 가장 절실한 가르침인지도 모른다.

 

* 이연학 요나 -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회 수도자. 현재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파주 지역의 한

연립 주택에 살며 수도원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머지않아 아시아의 한 나라에 수도 공동체를 형성할 준비도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1월호, 글 이연학 · 그림 김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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