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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찬미받으소서: 탈핵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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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5 ㅣ No.1391

[찬미받으소서] 탈핵 순례길

 

 

지난 2012년 2월 독일로 탈핵(脫核)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재생에너지 선진국 독일의 정부와 학계, 정당, 시민사회단체를 방문해 재생에너지 정책과 탈핵의 구체적 실천 방법을 배웠습니다. 수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한 부부가 기억납니다. 독일 북서지역을 흐르는 베저(Weser) 강 인근 브라케 지역 운테르 베저(Unter Weser) 핵발전소가 있는 마을에 사는 홀스트 쿠팔, 아스트리드 쿠팔씨 부부입니다. 부부는 이 마을로 이사 온 지 8년 만에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원인은 암이었습니다. 쿠팔씨 부부는 아들의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을 펼쳐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쿠팔씨 부부 외에도 자녀를 암으로 잃은 주민들이 많았습니다. 피해가 자꾸 늘자 주민들은 ‘그루페 악찌온 체트’(Gruppe Aktion Z)라는 반핵 단체를 만들어 핵발전소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연방정부에 핵발전소로 인한 피해 보상과 관련 정보 공개 요구 소송도 했습니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25주기 때는 핵발전소 반경 100㎞ 안에 사는 주민들과 함께 평화적 반핵시위도 전개했습니다. 핵발전소 주변을 인간 띠로 잇고, 당시 인근 브레멘시에 사는 주민들까지 합세해 2만 3천여 명이 시위에 나섰습니다.

 

지난해 6월 서울 대교구 신학생들과 함께 노후 핵발전소인 월성 핵발전소를 찾아가 월성 원전 인접지역 이주 대책위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지역에 사는 주민들입니다. 이 마을에 사는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 소변에서 방사성 물질인 삼중 수소가 나왔습니다. 주민들은 제발 이주만 시켜달라고 지금도 싸웁니다. 한국수력원자력 직원들은 핵발전소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사택을 새로 지어 이주했습니다. 평생을 핵발전소 주변에서 피해를 입고 사는 주민들의 이주 대책은 지금도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월성 지역과 같이 핵발전소에서 내뿜는 방사능물질과 가까이 살아가는 지역주민들의 암발생률이 다른 지역에 비해 3배 이상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후쿠시마 인근 미야기, 군마 등 지역에서 유아사망과 급성심근경색, 갑상선, 악성림프종과 백혈병이 증가했습니다(후쿠시마 공동 진료소, 후세 사치히코 원장 증언). 전 세계적으로 핵발전소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수많은 연구와 보고가 있습니다. 모두 핵발전소와 암 발생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지난겨울 탈핵희망 국토순례에 함께했습니다. 영광핵발전소에서 서울 광화문으로 향하는 50여 명의 순례단은 찬바람을 맞으며 한강대교를 건넜습니다. 그 길에서 과연 탈핵운동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지향하며 나는 이 길을 걷는가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니 너무나 편한 삶이었습니다. 핵발전소 주변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방사능에 노출되어 건강을 잃었고, 대도시에 전기를 보내려고 만든 송전탑 아래 사는 노인들은 어디론가 쫓겨 갔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밀양 할매들의 탄식을 듣고서 너무나 많은 전기를 소비하는 나를 보았습니다. 제 삶 안에도 끊임없는 소비를 조장하는 물신(物神)이 살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구 생태계 위기의 원인을 ‘시장’으로 봅니다. “절대 규칙이 되어 버린,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자연환경처럼 취약한 모든 것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56항). 창조주 하느님의 자리에 놓인 절대자 ‘시장’은 경제와 기술의 동맹으로 만들어졌고, 이들의 즉각적인 이익과 무관한 모든 것들은 배제되고 죽게 됩니다. 이 체제는 투기와 경제적 수익 추구를 앞세우는 체제입니다(찬미받으소서, 50, 54, 55항 참조). 이 절대자 ‘시장’의 체제 속에서 독일에 사는 쿠팔씨네 아이가 암으로 죽어갔고, 송전탑을 반대하는 밀양의 할매들이 질질 끌려갔고, 지금도 월성 나아리 75가구 주민들은 “살고 싶다”고, “이주를 보장하라”고 외칩니다.

 

희망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말합니다. “모든 이가 여전히 긍정적으로 관여할 수 있고 우리의 모든 약점에도 우리가 사랑으로 창조되었기에 반드시 관대함과 연대와 배려에서 나오는 행동이 샘솟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찬미받으소서, 58항). 과학적 맹신과 자본과 소비의 맹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어 모든 창조물들을 보살펴야 하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인간이 행동한다면 해결방법은 분명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는 행동’입니다”(찬미받으소서, 161항).

 

독일이 탈핵 정책과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선진국이 된 이유는 1970년대부터 시작한 시민들의 반핵운동에 있습니다. 후쿠시마 핵사고 당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석 달 동안 독일 전역의 핵발전소를 점검해 안전성에 문제가 있는 핵발전소만 폐쇄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전문가들은 정부의 조처가 충분치 않다고 반박하며 노쇠한 원자로 사용 중지와 원자력 이용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고, 베를린과 함부르크 같은 주요 대도시에서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핵발전소 반대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결국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독일 내 노후 핵발전소 7기를 3개월 간 정지 명령을 내리고, 2022년까지 핵발전소 모두 폐쇄하겠다는 탈핵 로드맵을 발표했습니다. 이 같은 결정이 있기 전부터 시민들은 핵발전소 주변을 인간 띠로 잇고, 자비로 탈핵 소책자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핵폐기물 운송을 막기 위해 수송 철로에 몸을 묶었습니다. 그 행동들이 모여 오늘날 독일 탈핵을 이뤄냈습니다.

 

변화의 때입니다. 지난겨울 촛불 속에서 희망을 보았듯이 결국 시민의 힘이 세상을 변하게 합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행동이 희망이 됩니다. 그 길은 행진의 길보다는 순례의 길에 가깝습니다. 순례는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내 안에 숨은 편리와 소비의 유혹을 돌아보고, 에너지 소비 없이 오직 내 두 다리로만 걸어갑니다. 그래서 순례입니다. 희망의 봄, 탈핵 세상을 위한, 우리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위한 순례길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찾아 이 땅에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노래하며 걸어갑시다! 이 지구를 위한 투쟁과 염려가 결코 우리 희망의 기쁨을 앗아가지 못합니다”(찬미받으소서, 244항).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7년 봄호(Vol. 37), 맹주형 아우구스티노(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사진제공 장영식 라파엘로(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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