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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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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구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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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12 ㅣ No.973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구상 시인 (상)


‘연탄빛’ 세상의 강을 안타까워했던 구도(求道)의 시인

 

 

- 구상 시인 대학시절.

 

 

1998년 어느 여름 저녁, 나의 아버지 구상 시인은 외출했다가 길에서 후진하던 차량에 받혀 다리 골절상을 입고 근처 병원에 입원한 그 길로 위독한 상태에 들었다. 합병증으로 평소 지병인 천식이 도져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본인은 체념했는지 집 가까이 있는 병원으로 옮겨주길 간청했다. 입에 호흡기가 채워져 있어 말을 할 수 없던 그는 떨리는 손에 연필을 쥐어주면 종이에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글씨를 써서 의사소통을 했는데,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상태가 더 위급해져 중환자실로 옮겨지는 중에 그는 다시 필담을 요구했다. 급한 대로 작은 메모지를 꺼내 볼펜을 쥐어 주니 거기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그리고 그는 할 말을 다 마쳤다는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죽 한번 둘러본 후 다시 혼수에 빠져들었다.

 

이후 그는 기사회생하여 여섯 해를 더 살다 갔지만, 그날 그가 병원 복도에서 남긴 메시지는 실제 임종 시엔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은 터라 가족과 측근들에겐 그의 유언으로 각인되었다.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그는 어째서 그러한 유언을 남겼을까? 자식인 나로서도 늘 그것이 미스터리였는데, 요즈음 아버지가 곧잘 쓰시던 표현대로 온통 ‘연탄빛’ 탁류가 되어흐르는 세상의 강이 안타까워 새삼 시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유미주의자도 참여주의자도 아니었던 시인 구상은 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토록 시의 역할을 기대했을까? 이를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만년에 도달했던 세계관을 드러내는 시 한편을 참고하며, 그 세계관을 이루게 되기까지 그가 살아온 삶에서 전환의 기틀이 된 요소들을 중심으로 살펴볼까 한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서

강이 되니 강은 크낙한

한 방울의 물이다.

 

그래서 한 방울의 물이 흐려지면

그만큼 강은 흐려지고

한 방울의 물이 맑아지면

그만큼 강이 맑아진다.

 

우리의 인간세상

한 사람의 죄도

한 사람의 사랑도

저와 같다.

 

- ‘그리스도 폴의 江 · 60’ 전문

 

- 낙동강 나룻배에 앉아 시상에 잠긴 구상 시인.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학자 집안과 수도원 학교의 유년을 지나 방황하는 청년기로

 

구상은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출생하였으나 네 살 때 북한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가 솔가해 옮겨 간 원산시 근교 덕원(德源)에서 자라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산보다 강을 좋아하였는데, 동네 언덕에 올라 마식령산맥으로부터 발원하여 송도원 바다로 유유히 흘러가는 적전강(赤田江)을 바라보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술회하곤 했다.

 

덕원 베네딕도 수도원 학교의 엄격한 독일식 교육방식에 더하여 대대로 벼슬을 지낸 사대부 가문 출신의 아버지가 요구하는 유가(儒家)적 규범들은 유일한 형제인 형과도 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 막둥이에게 꽤나 버겁게 여겨졌을 듯하다. 다만 백두진사 집안의 고명딸인 어머니가 글과 붓에 능해서 한문의 기초과정은 물론 고시조와 이조의 평민소설, 신소설에 더하여 삼국지연의 등의 중국소설까지 일찌감치 섭렵할 수 있었던 ‘문학 조기교육’의 혜택이 있어 그의 예술가적 기질에 숨통을 틔워주었을 것이다.

 

그 후 중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유학, 동성상업학교(현 동성중고등학교) 신학과에 적을 두게 된 그는 종교와 문학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으며 버티다가 3년 만에 중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성장환경 때문인지 그는 늘 ‘문학은 인생의 부차적인 것이요, 제일의적(第一義的)인 것은 종교, 즉 구도(求道)’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대학에 가서도 결국 전공을 문예과가 아닌 종교과로 정하고 만다. 어쩌면 그것이 평생 그를 지배해 온 상념이었던 듯, 어느 때부턴가 문학, 특히 시야말로 대장부가 후회 없이 일생을 바쳐야 할 가장 존귀한 소업인 줄 알게 된 이후로도 그는 가슴 한구석에 다음과 같은 자기 불만을 품고 살았다.

 

“너 아둔한 친구 요한아, 가령 네가 설날 아침의 황금 햇발 같은 눈부신 시를 써서 온 세상에 빛난다 해도 너의 안에 온전한 기쁨이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느냐?”(시 ‘요한에게’ 첫 구절)

 

신학교 중퇴를 기점으로 사제 지망의 뜻을 접은 그는 한동안 고향으로 돌아가 방황하다가 당시 나라 잃은 젊은 열기가 흔히 그랬듯이 일종의 실존적 유랑의 길을 가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부두나 공장에서 막노동 일을 하다가 결국 일본대학 종교과에 입학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종교를 학문으로 접근해 바라볼 기회를 맞는다. 더구나 그 대학에서 가르치는 종교학이란 것은 주로 불교학이었고, 그에 곁들여 수강한 소수의 기독교 강좌는 당시 가톨릭계에서 들으면 질겁할 진보 학설들을 개진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외려 ‘젊음의 활기를 맛보지 못하고 이승에서 저승을 사는 느낌을 주곤’ 하였다. 이렇게 그의 대학생 생활은 청춘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고뇌와 고독 속에서 씁쓸하게 소모되었다. 훗날 그는 자전적 연작시 ‘모과옹두에도 사연이’에서 그때의 암담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하숙집 ‘다다미’에 누워

나는 신의 장례식을

날마다 지냈으며

길상사(吉祥寺) 연못가에 앉아

‘짜라투스트라’가 초인(超人)의 성(城)에 오르는

그 황홀을 꿈꿨다.

 

- ‘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 · 7’ 중에서

 

* 구자명(임마쿨라타 · 소설가) - 구자명 작가는 (故) 구상 시인의 딸로, 1957년 경상북도 왜관에서 태어나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뿔」로 등단한 후 꾸준히 창작 활동을 펼쳐온 한국 문단의 중견 작가다. 한국가톨릭문학상과 한국소설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11일, 구자명(임마쿨라타 · 소설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구상 시인 (중)

 

분단과 전쟁… 격변의 시기 겪으며 실존주의 철학 탐구

 

 

- 피란 중 대구에서 문인극을 마친 후 구상 시인(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함께한 문인들. 오상순 시인(가운데 검은색 양복 상의)과 조지훈 시인(앞줄 오른쪽 네 번째)도 함께 했다.구자명씨 제공.

 

 

격랑의 세월 속에 문학을 통해 신앙의 구현을 모색한 중년기

 

해방 이후 구상을 기다리고 있는 삶은 모든 기득권을 잃고 맨손으로 출발해야 하는 개척자의 삶이었다. 일제 강점기때 구금되기도 했던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이력이 있어 공산당이 이용하려고 주목하고 있던 그는 원산 지역 문인들과 낸 동인지 「응향(凝香)」에 발표한 시 ‘여명도(黎明圖)’가 문제가 되어 일곱 가지 반동 죄목이 붙여진 필화를 입고 신변이 위급하게 된다. 이에 그는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여 1947년 초 월남을 한다. 이때 그는 고향의 큰집 같았던 수도원과도, 선친 타계 후 홀로 남으신 어머니와도, 머지않아 공산당에 납치되어 순교의 길을 가게 될 형 구대준 신부와도, 신혼의 아내와도 별리되어 ‘꿀꿀이죽처럼 질퍽하고 역한’ 서울 땅에서 ‘관 속에서 깨어나는 나자로의 부활을 그리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김동리, 조연현 등의 남쪽 문인들이 응향사건을 항론하며 거들어 당시 민족진영의 유일한 문학지인 「백민(白民)」에 시 ‘발길에 채운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와’를 발표함으로써 서울 문단에 입성하였다.

 

이후 얼마 안 되어 6·25가 터졌고 구상은 종군기자가 되어 국방부 기관지인 ‘승리일보’를 주재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전후 남한에서 연합통신, 대구매일, 영남일보 등 언론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저널리스트 문사로서 현실 참여적 삶을 십 년 가까이 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여러 형태의 정치적 수난을 겪게 되는데, 1952년 영남일보 주필 직에 있으면서 낸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의 판매금지령,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요청으로 상임고문을 맡았던 대구매일의 피습사건, 재일교포 지인에게 실험용 미제 진공관을 구입해 보낸 일로 용공 이적행위의 모함이 씌워진 레이더 사건 등이 그것이다.

 

레이더 사건으로 애초에 15년 구형을 받고 저 유명한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달라’는 법정 최후 진술을 한 후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나 문예사상가들의 작품이나 이론을 의식적으로 읽고 공부하였는데, 이때 홀연히 깨쳐 얻은 것이 ‘인간 실존에 내재된 것은 불안이 아니라 수치’라는 명제였다. 나중에 무죄 선고가 내려져 6개월 만에 출옥하여 집필한 희곡 ‘수치’가 3공화국 초기에 드라마센터 공연 개막 직전 공연보류 조치를 당하는 등 그의 필화는 이어진다.

 

대구 시절 그 언저리는 이렇게 구상에게 있어 시인으로서는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시기였으나 격동의 세월 속에 한국이 배출한 정치·문화·군계의 걸출한 인물들과 교유하고 후대에 이르러서도 거듭 회자되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결국 그의 문학적 삶에 필요불가결한 영향을 미친다. 오상순, 조지훈, 마해송, 최정희, 전숙희, 최태응, 김익진, 이중섭 등 피란 예술인들은 물론 박정희, 이용문 등 군(軍)의 인물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어 ‘군통’으로 불릴만치 전후 대구 사회에서 군부와 문화계의 가교적 역할을 부단히 수행하였다. 그러는 동안 내과의사인 부인 서영옥이 베네딕도 수도원이 월남하여 새로이 정착한 칠곡군 왜관읍에 순심의원이란 병원을 차려 그는 새 보금자리를 갖게 된다. 지금 구상문학관이 서있는 곳이다. 이로써 그에게는 가톨릭 신앙의 본가와 같은 베네딕도 수도원과의 유대가 다시 이어졌고 병원과 살림집이 위치한 낙동강변의 환경은 1970년대 이후 30년 가까이 천착하게 될 필생의 시 작업인 ‘강’ 연작시를 구상하게 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동안 그는 인간세사의 부조리함과 덧없음을 사무치게 느끼면서 다시 형이상학과 신앙의 세계로 내면의 초점을 맞추게 되는데,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로 심각했던 폐결핵이 두 차례에 걸친 폐수술을 통해 치유되고 난 70년대에 들어 그의 시 세계는 이 내면적 변화와 본격적으로 조응하기 시작한다. 이즈음 그에게 큰 공명을 일으킨 19세기 영국 시가 한 편 있는데, 프랜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이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 / 밤이나 낮이나 몇 해를 두고 그로부터 도망쳤다. / 내 마음의 얽히고설킨 미로에서 그를 피하였다.(후략)

 

신의 목소리가 항상 귓전에서 그야말로 하늘의 사냥개처럼 컹컹 짖어댄다고 느꼈던 구상은 때로 자신이 특별히 저주받은 영혼이 아닐까 하는 지독한 절망에 빠지기도 했으며, 결국 자신의 인생과 문학이 비의(秘義)에나 접하지 않고선 아무런 해결도 못 얻으리란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는 이때부터 키에르케고르, 마르틴 하이데거, 가브리엘 마르셀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탐구하며 자신의 세계관과 시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특히 유신론적 실존주의 사상가인 가브리엘 마르셀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 20세기 현철이 주창한 ‘현존에서부터 영원을 살기’를 자신의 문학과 인생의 대명제로 삼고 존재의 신비에 대해 깊이 사유한 결과, 구상 대표 시중 하나인 ‘말씀의 실상’이 탄생한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異蹟)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 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부활의 시범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한 우주, 허막(虛漠)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실상(實相)으로 깨닫습니다.

 

- ‘말씀의 실상’ 전문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18일, 구자명(임마쿨라타 · 소설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구상 시인 (하)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유언 남기고 영원의 동산으로

 

 

수염을 기르고 재속(在俗) 수행의 길에 오르다

 

구상은 1970년대 초 하와이대학에 객원교수로 초빙을 받아 3년간 한국전승문화 강의를 하고 돌아온다. 이후 그는 노년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수염을 기르고 세속적 권세의 접근을 사절함은 물론 대의명분을 내건 현실참여에의 부름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별 쓸모없는 ‘뒷방 영감’을 자처했다. 그러면서 존재의 내면에 더욱 눈을 돌리고자 생성과 소멸이 잘 드러나지 않는 강을 테마로 연작시를 쓰기 시작한다. 성 크리스토퍼(그리스어로 크리스토포루스) 설화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그 연작시를 일본식 발음대로 ‘그리스도 폴의 江’이라 이름 붙이고 종신 보금자리가 된 여의도 아파트에서 조석으로 마주하는 한강을 회심의 일터로 삼는다.

 

그런 한편 인생 회귀의 연령에 다가갈수록 더욱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는 자신의 신심을 가다듬고자 그는 복음 묵상집 「나자렛 예수」를 집필하고, 신앙 시 55편을 엮은 「말씀의 실상」을 펴내기에 이른다. 내가 자식으로서 기억하는 구상 시인은 하루도 취침전 기도를 빼먹지 않고 수십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위해 일일이 거명하며 바치는 기도문들과 완덕을 추구하는 동서고금의 잠언들을 빼곡히 적은 기도첩을 만들어 곁에 두고 사는, 흔치 않은 ‘모범’ 그리스도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부단히 원융회통(圓融會通)과 무위(無爲)의 섭리를 사유하며 세계종교사상의 다양한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우주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 구도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백 편을 쓰길 원했지만 병석에 누움으로써 예순다섯 편에 그치고 만 강 연작시 마지막 편을 그는 이렇게 매듭짓는다.

 

강이 흐른다……. // 또 어느 날 있을 증화(蒸化)야 아랑곳없이 / 무아(無我)의 갈원(渴願)에 체읍(涕泣)하면서 / 염화(拈華)의 미소를 지으면서 // 강이 흐른다……. // 강! 너 허무(虛無)의 실유(實有)여. - ‘그리스도 폴의 江·65’ 중에서

 

구상의 그러한 불이(不二) 사상은 오늘과 영원이 따로 있지 않고 함께한다는 ‘현존(現存)’ 의식과 맥이 닿아 있어 그의 필생의 주제인 ‘영원과 오늘’이 시적 형상화의 구도를 갖추기 시작한다. 1990년대 중반에는 연작시선집 「오늘 속의 영원, 영원 속의 오늘」이 출간되고 이것이 프랑스에서 번역, 출판되어 세계 명시선의 하나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그의 작품은 프랑스어 외에도 스웨덴어,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노벨상 본심 후보로까지 오르기도 한다. 이 ‘오늘’ 시리즈에서 그는 관념적 어휘를 지양하고 쉽고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여 이전과 달리 대중 독자와의 소통을 열게 된다.

 

- 1994년 서울시가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으로 한강 여의나루터에 세운 구상 시비(詩碑) 제막식. 왼쪽부터 박삼중 스님, 구상 시인, 류달영 박사, 김수환 추기경.(구자명씨 제공)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 ‘오늘’ 중에서

 

내게 장르는 다르지만 같은 문학인으로서 아버지 구상 시인에 대해 늘 의아하면서도 경이롭게 여겨졌던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가 언어의 기교에 치우쳐 말의 영혼(言靈)을 잃어버리는 문학을 지극히 경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시의 언어가 생명을 지니고 힘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 말을 지탱하는 내면적 진실, 즉 그 말의 개념이 지니는 등가량(等價量)의 추구와 체험이 요구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평단 일각에서 말하듯 메타포도, 운율도 갖추지 못한 듯 보이는 무기교의 시들을 상당량 써내면서도 김윤식 문학평론가의 표현을 빌면 ‘조금도 당황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현대문명 속에서의 시의 기능」이란 에세이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시는 말에다 생명을 부어 소생시키고 그 기능을 확대, 발전시킴으로써 인간사회의 유대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힘차게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그가 시를 쓰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고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란 믿음을 갖게 한 연원인 듯하다. 그래서 그는 유언을 그렇게 남겼던가 보다.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2004년 어느 봄날, 평생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했던 시인 구상은 자신이 몸담았던 이 불완전하고 유한한 세상에 대해 마지막 시집 「인류의 맹점에서」를 펴내어 믿음의 시들로 희망을 제시하고 ‘영원의 동산’으로 떠났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오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 전문

 

※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집필해 주신 분들과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25일, 구자명(임마쿨라타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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