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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성음악가 이문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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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4 ㅣ No.949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성음악가 이문근 신부 (상)


한국교회 첫 4부 합창용 「가톨릭 성가집」 엮어

 

 

「한국천주교회사」(유홍렬 지음)는 이문근 신부의 12대 조부 이수광이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芝峯類說)에 기술한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마두(마테오 릿치)라는 사람이 있어 … 그가 지은 책인 「천주실의」(두 권)에는 첫머리에 천주께서 처음으로 천지(天地)를 만들어 안양(安養)의 도(道)를 주재하심을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사람의 혼(魂)은 없어지지 아니하므로 짐승과는 크게 다르다 함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는 윤회육도(輪廻六道=불교)의 그릇됨과, 그리고 천당과 지옥 및 착한 일과 악한 일에는 갚음[報應]이 있음을 밝혔다….”

 

「한국천주교회사」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이리하여 이수광이 뿌린 씨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1백 80여년 후에 나온 그의 8대 손자되는 이윤하(가롤로)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천주교를 믿고 이를 위하여 피를 흘리게 되었다.”

 

1919년 충북 단양, 천주교 집안에서 순교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이문근 신부는 인천 박문학교를 졸업한 후, 사제가 되기 위해 1933년 4월 동성상업 을조에 입학한다. 동성상업(현 동성 중고등학교)은 일반 학생을 위한 갑조와 성소자를 위한 을조(성 니콜라오 신학교)로 구분됐다.

 

1938년 용산 성심 대신학교(현 성심여고 자리)에 입학해 1년간의 보수과와 2년간의 철학과를 마치고, 1941년 4년간의 신학과에 입학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 속에서 성심 대신학교는 1942년 2월에 폐쇄돼 독일의 성 베네딕토 신부들이 운영하던 덕원 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이문근 신부는 1944년 10월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노기남 주교로부터 신품성사를 받은 후, 명동본당 보좌신부로서 사목활동을 했다. 또 명동본당 혼성합창단(현 가톨릭 합창단의 전신으로, 1939년 남성3부 합창단으로 시작)의 반주자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혜화동 대신학교 신학생들의 음악교육에 힘썼으며, 무엇보다 최초의 4부 합창 성가집인 「가톨릭 성가집」을 1948년에 편찬했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는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 음대에서 교회음악을 수학했다. 당시 교황청 성가대 악장이었던 페로시(Lorenzo Perosi)와 그의 후임자 바르톨루치(Domenico Bartolucci)의 제자로서, 1952년에 그레고리오 성가 석사학위를, 1955년에는 작곡과 디플롬을 획득했다. 동시에 오르간을 부전공으로 수학했다.

 

귀국 후엔 가톨릭 신학대학 교수(1955~1964)와 학장(1964~1967)을 지냈는데, 이 시기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경희대학교 음악대학에도 출강했다. 특히 1957년엔 ‘전국 통일 가톨릭 성가집’인 「정선 가톨릭 성가집」을 출판했다. 

 

또한 1956년 4월부터 1958년 4월까지 월간 「가톨릭 청년」에 25회에 걸쳐 ‘교회음악’을 주제로 글을 연재했다. 이어 1961년 「주요첨례 그레고리안 성가, 오선보」를 출판했고, 한국 「가톨릭 청년」 1967년 6월호에 “과연 쟈스(재즈) 음악이 교회음악에 들어올 것인가?”, 그리고 8월호에 “내가 걷고 있는 韓國 聖音樂의 길”을 게재하기도 했다.  1977년에는 회갑기념 「이문근 신부 작곡집」이 한강성당에서 발행됐다.

 

 

1. 「가톨릭 성가집」(1948)

 

한국 가톨릭 성가집의 역사를 보면, 「신학교 성가」(용산 1911,1912,1920, 4선보에 4각 네우마), 「사리원 성가집」(1921년 분실), 「朝鮮語 聖歌」(덕원 1923 분실)를 거쳐, 현존하는 첫 성가집인 「죠선어성가」(서울 1924) 이후 서울, 덕원, 대구, 회령 그리고 연길을 중심으로 약 12권의 성가집이 더 출판됐다. 「대구교구 성가집」(1938)과 「가톨릭 성가」(덕원 1938년)가 마지막 두 권이다. 이 성가집들은 나름대로 다양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성가의 멜로디만 싣고 있다.

 

이문근 신부가 1948년 발행한 「가톨릭 성가집」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4부 성가집으로서, 한국 교회음악과 성가집의 역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가톨릭 성가집」의 엮은이로서 이문근 신부가 남긴 ‘머리말’(당시 표기대로)로써 이 성가집의 성격과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다.

 

“이 성가집은 그 이름이 말하는 바와 같이 대부분이 예전부터 우리 가톨릭 교회 내에 성가로 사용되든 시와 노래를 수집하여 거기서 우리 땅에 제일 적합하고 제일 아름다운 것을 가리여 이루어진 책이다. 

 

여기에 모은 성가는 예전적 창미사가 아닌 미사와 성체 강복 때에 불러야 할 것이다.

 

미사는 제대우에 신부가 참례하는 “교우들과 더브러” 천주께 드리는 제일 거룩한 제사이다. 그러므로 신부가 거룩한 히생을 성부께 드리는 동안 모든 교우들의 기도도 노래와 함께 “유황 연기같이” 천국을 향하여 올러가야 할 것이다….

 

곡은 될 수 있으면 모여있는 모든 교우들이 다 함께 부르기에 용이하고 가톨릭적 감촉이 특히 풍부한 것을 고르고저 하였다. 그러므로 이 성가집은 교우들의 개창을 희망하는 것이다. 또 많은 지방에서 큰 축일에 성가를 합창하여 더욱 그날을 성대하게하고 아직 이렇지 못한 지방에서도 그런 뜻과 그런 계획은 있는 모양으로 이런 성가대를 위하여 혹 유조할까하여 그레고리안 성가 외에는 전부 혼성 합창곡으로 편곡되었다. 많이 이용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아직 적당한 반주책이 없는 지방에서는 이 편곡을 그대로 반주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변변치 못하나마 여러 지방 성가대에 일조라도 될 수 있다면 이상없는 영광으로 알겠다.”

 

외국 성가책과 한국에서 출판된 성가책들을 참고해 전체 117곡으로 엮은 「가톨릭 성가집」은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미사와 성체강복”을 위한 성가들로 구성됐다. 이 성가집에서 이문근 신부는 3곡의 자작곡(83번 福者讚歌, 93번 삐에 뻴리까네, 112번 라우다떼) 외에도, 40곡을 편곡했고, 7곡의 그레고리오 성가에 반주를 붙였다.

 

* 최호영 신부(가톨릭대 음악과 교수) - 독일 레겐스부르크 국립음대를 거쳐 뮌헨 국립음대에서 오르간 디플롬과 그레고리오 성가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대 음악과 교수, 서울대교구 성음악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14일, 최호영 신부(가톨릭대 음악과 교수)]

 

 

[한국 가톨릭 문화의 거장들] 성음악가 이문근 신부 (중)

 

성음악 ‘보편화’… 우리 실정 맞는 성가집 편찬

 

 

- 1969년 은경축 맞은 이문근 신부.

 

 

2. 「정선 가톨릭 성가집」(1957)

 

1956년 3월 20일부터 23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전국 주교회의 결의에 따라 ‘전국 통일 가톨릭 성가집’ 출판이 확정됐다. 이에 1956년 7월 19일 서울 성신대학에서 ‘통일 가톨릭 성가집 발간 위원회’의 합의에 따라 「정선 가톨릭 성가집」이 출판됐다. 이는 그동안 교구 혹은 지역을 중심으로 출판되던 성가집이 비로소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고 전 교구를 포용하는 ‘통일 성가집’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래는 개창 혹은 혼성합창을 위해 오르간 반주가 동반된 이 성가집 머리말의 일부다.

 

“이 성가집은 대부분이 예전부터 우리 가톨릭 교회 내에 사용되던 시와 노래를 수집하여 거기서 우리 땅에 가장 적합하고 우리 교우들의 “피”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가리어 만든 것이다…. 이 성가집에는 대체로 1948년에 서울서 출판되었던 「가톨릭 성가집」에 실려 있는 것을 원칙적으로 그대로 옮겨놓고 좀 부족한 것을 고치고 혹은 새로 편곡하고 그 외에 많은 새 노래를 더 넣었다. 이것으로 교우들의 여러 가지 요구에 다 응할 수는 없겠지만 책의 부피도 생각지 않을 수 없어 이쯤으로 여러분 앞에 내놓기로 하였다. 여러 성가대에 감히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먼저 노래를 열심으로 배워 음악적으로 훌륭한 단체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성가대의 목적의 십분의 일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니 노래로 자기와 교우들이 예술의 삼매경이 아니라 기구의 신비경으로 끌려들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성가집에는 전체적으로 182번까지의 성가와 더불어 부록으로 이문근 신부 작곡의 혼배미사(국어), 그리고 그레고리오 성가 3작품 즉 혼배미사(라틴어)와 연미사 그리고 사도예절이 첨가됐다. 그런데 판을 거듭하면서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은 상태로 이문근 신부 작곡의 ‘병인순교복자 노래’와 미사곡 3곡이 첨가됐다.

 

마지막으로 이문근 신부 작곡의 성가들(124번 ‘성녀 소화 데레사’, 127번 ‘복자 찬가’, 128번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노래’, ‘병인순교복자노래’, 140번 ‘삐에 뻴리까네’, 혼배미사, 3개의 창미사)과 35곡의 편곡 그리고 7곡의 그레고리오 성가 반주가 실렸다.

 

 

3. 「주요첨례 그레고리오 성가, 오선보」(1961) 

 

「가톨릭 성가집」(1948)과 「정선 가톨릭 성가집」(1957년)에 실린 그레고리오 성가는 성수예절과 성체강복을 위한 곡들이었다. 이문근 신부는 미사 전례에 필요한 그레고리오 성가를 선별해 1961년에 「주요첨례 그레고리오 성가」를 편찬한다.

 

이 성가집은 표기법과 구성에 있어 여러 가지 특징을 갖는다. 먼저 그레고리오 성가를 오선지에 8분음표와 4분음표로써 멜로디만 표기했다. 또한 라틴어를 국어발음으로 기입하되 한 음절 안에 발음되는 두 발음을 글자의 크기로 구별했다(예. 끄리스테). 미사전례를 구성하고 있는 통상부분(Ordinarium), 고유부분(Proprium) 그리고 낭송 부분을 ‘주요첨례’(첨례-‘축일’의 옛말)에 맞추어 전례력에 따라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다.

 

 

4. ‘교회음악’(「가톨릭 청년」(1948년 4월~1958년 4월) 

 

「가톨릭 청년」에 연재한 25회 분량의 글을 통해 이문근 신부는 그리스도교 초대 교회음악부터 20세기 그레고리오 성가의 복원까지 폭넓고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1954년 4월호에서 이문근 신부는 ‘교회음악’ 연재에 대한 의미와 범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페이지를 통하여 독자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어떤 국한된 범위를 잡아 깊이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일반 교회음악에 관한 사정을 역사를 밟아가면서 소개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교회음악이란 말은 비단 가톨릭 교회음악뿐 아니라 소위 프로테스탄트의 음악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루터 이전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구별이 없었던 것과 같이 음악에 있어서도 그런 차별이 없었기 때문이고, 루터 이후에 있어서도 진정한 예술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술은 본질적으로 가톨릭성(공통 혹은 보편성)을 띠우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가톨릭 교회음악이니 프로테스탄트 음악이니 하는 구별을 일부러 하지 않는 바이다. 그리고 다른 종교에도 음악이 없는 바 아니나 범위가 너무 넓어져서 정리에 곤란할 뿐 아니라 내 자신 그런 음악에 대해서는 무식하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고백하고 다만 그리스챤 음악에 국한하기로 하였다. 더구나 그리스도교 이전의 헤브레아 음악에 있어서는 근래 음악학자들이 큰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거기에 대한 체계적인 논설을 할 수 없으며, 소위 서양 음악의 시초요 기준이 된다고 하는 희랍 음악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로 밀고자 한다.”

 

이문근 신부는 초대 교회음악부터 그레고리오 성가, 다성음악, 아르스 노바, 15~16세기 르네상스 다성음악 그리고 바로크의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나아가 바흐와 헨델에 이르기까지 비교할 수 없는 섬세하고 풍부한 내용으로 그리스도교 음악을 조명했으며, 바흐 이후의 교회음악, 19세기에 성녀 체칠리아 협회를 통한 부흥, 그리고 그레고리오 성가의 복원 과정과 그 이후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특히 1950년대의 당시 한국 상황에서 이러한 내용을 다뤘다는 것은 교회음악에 대한 세계적인 지평을 전제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21일, 최호영 신부(가톨릭대 음악과 교수)]

 

 

[한국 가톨릭 문화의 거장들] 성음악가 이문근 신부 (하)

 

1960~70년대 한국교회 성음악 ‘대중화’ 이끌어

 

 

5. 교회음악의 토착화에 대한 고민

 

1967년 발표된 「전례에서 음악에 대한 훈령」(Instructio de Musica in Sacra Liturgia) 제61항은 이러하다.

 

“고유한 음악전통을 가지고 있는 지방, 특히 전교지방에서는 성음악을 적용시키는 문제에 있어, 음악가들의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각 민족이 지니고 있는 특유한 정신과 전통과 표현방법 등에 거룩한 것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예전과 교회음악전통과 아울러 자기네들이 일해주는 그 민족의 언어, 대중의 노래, 고유한 표현방법까지도 잘 알아야 한다.”

 

이문근 신부는 짧은 기고 “과연 쟈스(재즈) 음악이 교회음악에 들어올 것인가?”(「가톨릭 청년」 1967년 6월호)에서 성음악 훈령 제61항을 주제로 한국 음악의 토착화를 근본적인 의미에서 제시했다.

 

“우리 피가 흐르는 고래의 한국음악, 적어도 한국적인 음악을 어떻게 성당에 적응시킬 것인가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초저녁 이류 대포집과 같은 소란스러운 음악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가사를 붙였다고 해서 그것이 성가가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교회음악에서 요구하는 에토스(Ethos)는 우리 마음이 숭고한 것에로 들려지고 천주님께로 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적합하는 파토스(Pathos)를 누구나 느끼게 하는 그런 악음이라야 쓰지 않겠는가.”

 

이문근 신부는 비오 10세 교황이 제시한 교회음악의 세 가지 조건, 즉 성스러워하고, 참된 예술품이어야 하며,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 조건에서, 특히 ‘보편성’을 이유로 재즈 음악이 한국교회 전례에 들어오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한국(적) 음악의 연구 및 적용을 토착화의 길로 강조했다.

 

‘내가 걷고 있는 韓國 聖音樂의 길(「가톨릭 청년」 1967년 8월호)에서는 한국의 향토악(鄕土樂)과 서양음악을 비교했다. 결국 “종교음악으로 작곡된 서양음악은 예식과 관계없이 사람에게 성스럽고 엄숙한 효과를 준다… 이 의미에서 서양음악이 한국음악보다 더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라는 개인적 의견을 밝힌다. 

 

그러면서도 “다행히도 나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선법에 의한 화성학을 배운 것이 있다. 선법에 의한 화성학은 서양음악과 동양음악 사이에 교량역할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그 특징이요…”라고 하면서 ‘선법’이 토착화의 열쇠라고 강조한다.

 

악보1. A는 4부 합창 악보며 B는 오르간 반주 악보다. 최호영 신부 제공.

 

 

6. 오르간 연주자

 

이문근 신부는 1955년 12월 21일과 22일 국립국장에서 귀국 오르간 연주회를 가졌다. 무엇보다도 생상스(Camille Saint-Saens)의 교향곡 3번, 일명 오르간 교향곡을 한국 초연으로 연주하였다. 

 

또한 이문근 신부는 4부 성가 반주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일반적 기준을 「정선 가톨릭 성가집」(1957년)의 ‘몇 가지 안내’에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제시했다.

 

“이 책에는 대부분이 합창을 할 수 있도록 편곡이 되어 있으므로 같은 음이라도 계속해서 여러 번 씌어 있는데, 그것을 풍금으로 칠 때에는 강한 박자에서만 새로 집허주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멜로디만은 씌어 있는 대로 연주하면 더 효과적이 아닐까 합니다.

 

예를 들면 위에(악보1) A와 같이 된 합창을 위한 편곡을 풍금으로는 B와 같이 연주하는 것이 좋을 것 같고, 반대로 풍금을 위해 씌인 곡을 합창으로 하려면 긴 음을 나누어 말마디 수에 맞게 해야 할 것입니다.”

 

A와 같은 악보를 B의 방식으로 반주하는 것은 특별히 성가 반주에 있어서 가장 기초이면서도 중요한 사항이다. 즉 “멜로디만은 씌어 있는 대로 연주”함으로써 멜로디의 흐름과 리듬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반주의 올바른 기능이다.

 

“반대로 풍금을 위해 씌인 곡을 합창으로 하려면 긴 음을 나누어 말마디 수에 맞게 해야 할 것입니다”의 의미는 이문근 신부의 미사곡을 통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악보2. 이문근 신부가 작곡한 기리에(자비송). 최호영 신부 제공.

 

 

위 악보(악보2)는 ‘기리에’의 선율을 반주할 수 있도록 작곡된 오르간 곡이다. 만약 이 노래를 모든 신자가 개창하는 것이 아니라 4부 합창으로 노래하려면, 멜로디 이외의 성부 즉 알토, 테너 그리고 베이스는 멜로디의 리듬에 따라 “긴 음을 나누어 말마디 수에 맞게” 노래해야 한다. 

 

이문근 신부가 「독서신문」 1973년 10월 28일에 게재한 글의 일부다.

 

“부동의 그 무엇을 어디서 찾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유명한 철학이나 신학저서에서 또는 참된 예술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무엇’의 일부분 밖에 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서만 ‘그 무엇’의 전부를 찾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문근 신부의 음악 세계를 탐구하면서, 그분은 ‘성음악’이라는 참된 예술에서 ‘그 무엇’의 일부를 찾았고, 나아가 사제라는 정체성(identitas) 속에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통해 ‘그 무엇’의 전부를 추구하셨던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28일, 최호영 신부(가톨릭대 음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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