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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체ㅣ구역반

소공동체를 위하여6: 기초공동체의 내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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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73

소공동체를 위하여 : 제6강 기초공동체의 내적 활동

 

 

* 이 글은 대구 복자성당에서 있었던 최병화(요셉) 님의 대림절 특강을 이용호 신부가 정리한 내용임을 밝혀 드립니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23)

 

기초공동체의 외적활동이 복음선포라면 기초공동체의 내적활동 목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즉 사랑을 실천하여 일치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우선 과제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여기서 ‘하라.’는 명령어이다. 명령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것은 계명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이 계명을 지키는 일은 사랑을 통해서 일치를 이룸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성부께 기도하셨다. 이 일치는 기도의 차원이다. 사랑보다 더 높은 차원을 말한다. 일치를 위하여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셨다. 일치는 우리가 성화를 이루는 최고 영성이며 필수과목이다. 그래서 기초공동체의 내적활동의 목표는 일치이고 우리 구역, 반 공동체도 바로 일치를 이루어야 하겠다.

 

 

1. 일치는 핏줄과 같은 사랑이다.

 

예수님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다. 이 이웃 사랑은 핏줄과 같은 사랑이다. 사랑이 짝사랑이면 차라리 쉽다. 일방적으로 해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화살표가 일방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고 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고 내가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지 못하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사랑하게 하려면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 어떤 꼬마가 귤과 바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아이가 과일을 먹고 싶어하자 귤을 하나 주었다. 그런데도 옆에 있는 애는 만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나나를 먹고 싶은데 귤을 주니, 귤을 얻어먹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나나가 아까워서 주지 못하고 약간 덜 좋아하는 귤을 양보했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흡족하게 하지는 못했다. 예수님은 “남이 바라는 대로 해주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서로 사랑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것은 수난적인 사랑이다. 우리 몸에서 핏줄을 통하여 피가 돌듯이, 사랑이 끓어지면 피가 통하지 않는 동백경화나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에 걸려 중병을 앓다가 결국은 죽게 된다. 수난하지 않고 자신이 아끼는 최고의 것을 내어 주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끼리끼리 노는 것이 되고 수난이 없는 사랑이 된다.

 

친구 중 한 명이 어떤 여인과 사랑해서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해서 한 집안에 살면서 며느리는 시어머니,  시누이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 결코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서로 양보하지 않았고 고부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 골이 깊어 결국에 이들 부부는 갈라서게 되었다. 수난적 사랑이 아니면 분열이 오고 그 분열은 단절을 가져온다.

 

 

2. 일치의 수덕은 대화이다.

 

대화는 일치에로 나아가는 덕목 중에 하나다. 즉 덕을 쌓듯이 대화는 성화를 이루어 준다. 그러면 대화란 무엇인가? 대화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이다. 한자 受(수)는 예전에는 준다는 의미와 함께 받는다는 의미로도 사용했으며, 원래는 준다는 의미는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엔 손을 사용하여 무엇을 준다는 의미로 授(수)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손 手는 원래   (수)와 같은 뜻이라서 手가 앞으로 나와서  사용하여 손으로 주는 것을 받는다는 뜻으로 授를 사용하게 되었다.

 

마음을 주고 받는다는 의미가 될 때, 바로 마음(心)이 들어가 애(愛)가 되며 이것은 마음을 주고받는 것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대화의 본(本)적지는 사랑이고 사랑의 원(原)적지는 하느님이시다.

 

로마서 5장 5절에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떤 채널을 통하시든지 우리와 대화하시려고 한다. 라틴어 로고스(Logos)라는 말은 말씀, 예수 그리스도, 대화, 길이라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는 쌍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국에 전화를 할 때 중계 위성을 통하여 연결이 되듯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중계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사람 사이의 마음의 길은 대화로 연결된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길도 예수님이라는 대화를 통하여 가능해진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바로 일치의 수덕이 대화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는  대화를 통하여 일치를 이룬다.

 

물론 대화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말로 다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 말,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20-30%에 지나지 않고 다른 것, 즉 눈빛, 손짓, 억양, 크기, 길이, 웃음, 울음 등이 70%를 차지한다. 부부 사이에 대화를 할 때 “알아서 하이소.”라는 말 한마디도 억양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진다. 남편이 부인에게 “여보, 삼촌 생신인데 부조를 50만 원 정도 해도 되겠소?” 하고 물었을 때 부인이 “알아서 하이소.”라고 대답했다고 하자. 이 대답의 억양이 아주 높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면 허락의 의미가 아니라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고 만다.

 

울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극빈자 할머니들에게 김장을 해서 나누어 드리는 행사가 있었는데, 김장한 것을 가져온 봉사자에게 “욕봐, 우야꼬.”하고 감사해 했다. 이 할머니가 하신 말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억양을 무시해버린다면 그 만큼의 감동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담아서 대화를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3. 일치는 다양성을 가진다.

 

일치는 다양성을 인정할 때 이루어진다. 기초공동체 안에는 직업이 서로 다르고 나이가 10대에서 80대까지 다르며 살림살이가 각기 다르다. 그러나 모두가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 오순절 장애자들이 사는 곳에 가면 어떤 정박아는 밥만 먹여주는 일을 한다. 또 어떤 친구는 부지런히 변기만 가져다 준다. 다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배론에 있는 시설에도 가보면 어떤 친구는 하루 종일 신발만 가지런히 한다. 또 한 친구는 방안에 떨어지는 휴지만 하루 종일 치우는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한 사람도 기초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가진 능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고유성을 통하여 공동체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공동체에 제공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가 가진 고유성은 풍요로워진다. 들놀이를 간다고 가정해 보자. 각기 쌀, 코펠, 과일, 찌개, 음료수를 가져와 내려놓고 함께 나누어 먹는다. 어떤 이가 쌀만 가져 왔다고 과일을 먹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서로 공유하지 못하는 공동체가 되어, 쌀 가져 온 사람은 쌀만 먹고 과일 가져온 사람은 과일만 먹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일치한다면 기초공동체인 우리의 구역, 반 구성원들은 아주 풍요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동체의 일치가 단 한번의 노력으로 이룰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노력도 계속되어야 한다. 다양성을 다른 말로 고유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4. 일치는 용서이다.

 

친교를 이루며 잘 지내다가도 공동체 안에 어떤 일을 결정해야 하거나 변화가 오면 갈등이 생기게 되고, 갈등이 생기면 그 동안 친교를 이루워 왔던 일치의 모습은 큰 위기에 부딪히게 된다.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쪽이 죽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죽어야 했던 것과 같은 이유다. 상반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면 시간이 지날수록 둘 사이에 골이 깊고 멀어져서 하나되기가 어려워진다. 남북이 대립하는 것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세계에서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분단국가가 되었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가지 못하고 오지 못하는 백성이 되었다.

 

용서는 다리와 같아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게 하는 수단이다. 용서 없이는 일치를 유지하고 이룰 수가 없다. 부부가 자존심 때문에 서로 버티면 버틸수록 화해가 어렵고 일치하기 힘들다. 건물을 지을 때 콘크리이트는 천천히 양생시켜야 좋지만, 용서는 빠르게 할수록 좋은 것이다. 세상에서 지옥을 사는 사람은 23시 50분을 다투어 용서하지 못해 속을 끓이고 살고, 단 10분만 용서하고 평온하게 지내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은 23시간 50분을 서로 용서하고 모든 일에 용서를 하며 사는 사람이다.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어찌 순탄한 일치 상태만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일치에 문제가 생기면 빨리 서비스(AS)를 받으면 된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이 고장나면 빨리 고쳐야 하듯이, 일치에 문제가 생기면 빨리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 그 서비스는 바로 용서다.

 

 

5. 일치는 기도이다.

 

일치를 위한 마지막 방법은 기도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요한 17장에서 수난을 받으시기 전에 성부께 제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간곡한 청을 드리신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다음에는 성부의 뜻에 맡겨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치는 우리의 소명이고 은혜인 것이다. 예수님도 기도하셨듯이 우리도 항상 일치를 위하여 우리의 구역, 반이 활성화되고 서로 다양한 가운데 하나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월간 빛, 2002년 6월호, 정리 이용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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