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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청주의 순교자, 원시보 야고보와 원시장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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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4-18 ㅣ No.612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청주의 순교자, 원시보 야고보와 원시장 베드로

 

 

청주에서 순교한 또 다른 순교자가 있는데, 그는 원시보 야고보(1730-1799년)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순교자 원시보와 그의 사촌동생 원시장 베드로(1732-1793년)를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재물을 나누고 금요일마다 단식을 한 원시보

 

원시보 야고보는 사촌동생인 원시장 베드로와 함께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에 살았습니다. 그는 온순하며 곧고 솔직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자였던 그는 주일과 축일마다 이웃 사람들을 초대하여, “오늘은 구세주의 날이니 기뻐하며 이를 축하해야 하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선물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하면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처럼 남들에게는 넉넉하게 베풀면서도 자신은 과거에 저지른 식탐의 죄를 갚으려고 금요일마다 단식하였습니다.

 

1792년에 관장이 체포하려 하자, 이를 알고 미리 피하였습니다. 이때 체포된 사촌동생의 순교 소식을 듣고 함께 순교자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신앙을 회복한 그는 주문모 신부에게서 첩을 내보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에 그는 “사실 저는 첩을 두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시 첩을 내보낼 것을 약속합니다.” 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실천하였습니다. 박취득 라우렌시오와 친분이 매우 두터웠는데, 서로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신앙의 덕목을 실천하였고, 순교에 대한 갈망을 나누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1798년에 덕산 포졸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천주교를 따르는 것이 사실이냐는 말에, “사실인즉 하느님을 섬기고 제 영혼을 구원하려는 소망으로 그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자들을 고발하라는 말에, “하느님을 섬기고 우리 영혼을 구원하려는 소망을 가진 세 사람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미 박취득과 방 프란치스코와 정산필 베드로는 서로 고발하기로 약속을 했기에 이들의 이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주뢰질과 몽둥이로 찌르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배교하라는 말에는 “조금도 그럴 수 없습니다.” 하고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이어 이송된 홍주 진영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고문을 받았습니다. 다시 덕산에서 혹독한 매질을 당해 두 다리가 완전히 부러졌습니다. 1799년 2월 청주로 이송되어 갈 때 가족들에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본성의 정을 따라서는 안 되오.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잘 견디어 내시오. 그리고 우리는 기쁨으로 하느님과 선하신 마리아 곁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처럼 중요한 일에서 어리석게 행동하지 마시오. 그러니 더 이상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시오.”

 

청주에서는 “내가 하느님을 위해 순교자로 죽기를 갈망한지 9년이 됩니다.” 하면서, 순교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회초리, 몽둥이, 곤장, 주뢰질 등을 묵묵히 당하였고, 마침내 1799년 3월 13일(음) 7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곤장을 맞고 감옥 밖에서 얼어 죽은 원시장

 

그의 사촌동생 원시장 베드로는 격한 성격 때문에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이 50이 넘어 입교한 뒤 그는 1년 동안 고향을 떠나 기도와 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격한 성격에서 온화한 성격으로 완전히 바뀌었고, 애덕 실천으로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었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결과 서른 가족 이상이 입교하였습니다.

 

입교한 지 2년이 지난 뒤 홍주목사는 원시보를 체포했습니다. 배교하고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하자, 그는 “하느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고, 다른 천주교인들을 고발할 수도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격노한 관장은 주뢰형을 내리고, 치도곤 70도를 치게 하였습니다. 이튿날에도 그는 셀 수 없이 곤장으로 맞아 살이 온통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등뼈가 부러져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감옥에 도착한 그는 오히려 기쁘고 만족한 기색을 드러냈으며, 아전과 포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792년 12월 17일(음) 그를 죽이려고 굵은 밧줄로 묶고 물을 퍼부어 밤의 추위에 얼어 죽도록 감옥 밖에 내버려두었습니다. 이 형벌 속에서도 그는 오직 구세주의 수난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 나를 위해 온몸에 채찍질을 당하시고, 나의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해 내 몸을 덮고 있는 얼음들을 보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는 감사기도를 드린 다음 61세의 나이로 그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2009년 사목교서에서 교구민들에게 “이번 시노드와 교구 설정 50주년을 계기로 교구 공동체가 더욱 말씀과 성체 중심의 삶을 살고 가난한 이를 섬기며 복음화 사명을 ‘이웃으로, 세계로’ 힘차게 그리고 항구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청주 교구민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이러한 삶을 살다가 청주에서 하느님을 위해 순교한 순교자 원시보 야고보와 홍주에서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를 닮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경향잡지, 2009년 3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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