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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체ㅣ구역반

소공동체를 위하여8: 기초공동체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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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75

소공동체를 위하여 - 제8강 기초공동체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요인들

 

 

* 이 글은 대구 복자성당에서 있었던 최병화(요셉) 님의 대림절 특강을 이용호 신부가 정리한 내용임을 밝혀 드립니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시편 133,1)

 

 

1. 공동체가 성장하는 필요한 것 중에 첫 번째는 소속감이다

 

1950년대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될 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잔치가 있으면 며칠 내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을 거들고, 또 초상이 나면 마치 내 집안 일처럼 돕곤 했다. 들에서 일을 할 때도 품앗이를 통한 모내기를 했으며, 명절에는 송편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새해가 되면 동네 어른들께 세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인지 시골동네에서는 누구든지 형님, 아우,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빈번하게 불리었다. 마을 일 또한 함께 모여 공동으로 의논하고 결정했으며, 장마에 둑이라도 무너지면 언제 어떻게 부역을 할 것인지를 논의하곤 했다.

 

기초공동체의 모습은 바로 이런 취락구조와 형태를 같이 한다. 기초공동체 역시 함께 모여서 의논하고 말씀의 전례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임을 얼마나 잘하느냐 보다는 실제 활동무대가 취락구조의 경우처럼, 함께 나누고 의논하고 결정하는 소속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취락공동체는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하여 성장하고, 나아가 명절에는 음식을 나누며 품앗이 과정을 통하여 모두가 마을 일을 공유하고 있다. 기초공동체도 이와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기초공동체는 취락공동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복음을 나누고 참여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서 이루는 공동체로서, 어쩌면 인간 취락공동체 보다도 더 뛰어난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주의 원주민들이 유일하게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자동차인데, 이렇게 구입한 자동차는 형제들을 찾아가는 일에만 사용한다고 한다. 이들은 유대의식이 강해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육감으로 서로의 안부를 잘 맞춘다고 한다. 캐나다 인디언 아이들에게 질문을 해서 대답을 잘하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 아이들은 하나, 둘, 셋하고는 한꺼번에 손을 쳐든다. 1등으로 손을 들면 그 아이가 왕따 당하기 때문이라는데, 혼자만 1등 할 수 없다는 그들의 교육 때문이란다.

 

우리는 무한경쟁시대라고 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1등 하는 법을 먼저 가르친다. 1등을 하면 부모의 칭찬과 더불어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을 차지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 이런 행동이 공동체 의식을 몰아내는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렇게 자라서 성인이 되면, 내 것밖에 모르고 철 대문도 모자라 개조심 간판까지 붙여 놓아야 속이 편하다고 한다. 집안에서까지 이기심을 키우는 잘못된 교육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취락공동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초대교회, 특히 사도행전 2장에서는 우리 구역 반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소속감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든 함께 나누고 함께 일할 때 우리 모두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마틴 루터 킹은 흑인들의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해서 “내 백성이 수모를 당하고 있다.”라는 소속감을 피력했고, 마더 데레사 수녀도 굶주린 이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 굶주리고 있다.”고 표현했다. 예레미아 예언서의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다.”라는 표현 역시 하느님과 백성이 하나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할머니가 손자를 보고 “아이고, 내 새끼”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할머니 안에 손자가 있고 손자 안에 할머니가 있다는 소속감의 표현이다.

 

저녁 시장에 나가서 맛있는 찬거리를 보면 누가 먼저 생각나는가, 그것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면서, 50년 동안 헤어져 한번도 만난 적 없이 또 편지 한번 전화 한번 못했는데도 어떻게 북에 간 아들을 남한의 어머니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들과 어머니 안에 새겨진 소속감 때문이다. 내 백성이라는 말 속에도 이런 소속감이 있다. 내 공동체를 사랑해야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다.

 

취락공동체가 가지는 같은 마을이라는 것 이상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는 정과 사랑은 일치를 이루는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같은 마을, 같은 인류, 같은 피조물이라는 차원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면 인류는 한가족으로 성장할 수 있다. 때때로 취락공동체에서 가뭄으로 인해 아랫마을과 윗마을의 불화가 생길 수 있다. 서로 물을 먼저 대겠다고 다투기 때문에 싸움으로 비화되는 경우라 하겠다. 집단이기주의를 고집하는 한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제 열린 공동체로 나아가야 할 때다.

 

 

2. 목표를 세워야 한다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이루어야 할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목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달음질을 하되 목표없이 달리지 않고 권투를 하되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1고린 9,26)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필립 3,10.14)

 

목표는 기대를 나타낸다. 셋방살이하는 부부가 내 집을 갖고 싶은 기대감을 가질 때 내 집 마련을 위한 목표를 세우게 된다. 어떤 학생이 의사가 되고 싶다는 기대감을 가질 때 의과대학에 들어갈 목표를 세우게 된다. 기초공동체 역시 구성원들이 모이면 서로 이 모임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화하여 기대를 다 표출해서 목표를 정해야 한다. 기대를 다 표출해 보면 참으로 다양한 바람이 있을 것이다. 기초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신앙이 성장하기를, 또 어떤 이는 성서공부를, 또 다른 이들은 봉사하는 일을 배우는 것에 대하여, 또 어떤 이는 본당신부의 권유로 마지 못해 나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대치를 수렴하는 목표를 정해서 따라가야 한다. 목표가 없으면 기대에 어긋나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반발이 생기게 된다.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의욕이 있을 때 비로소 지출을 억제하고 노력하게 된다.

 

장개석과 모택동은 서로의 사상은 달랐지만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는 합심했다. 목표를 이루려고 하면 긴박감이 생긴다. 이 긴박감은 서로를 더욱 단결하게 하는 힘이 된다. IMF때 금을 내놓은 것은 공동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결집현상이다. 어려움이 생기면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목표를 향하여 뛰게 된다. 그러나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눈이 내부 안으로 쏠리고 불평불만을 털어놓게 된다.

 

반장들의 사례발표를 들을 때도 한결같이 무언가 노력하는 공동체는 계속해서 발전하지만, 아무 것도 시도해 보려고 하지 않는 그야말로 목표가 없는 공동체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 작대기에 홍당무를 달아서 당나귀 앞에 갖다 놓으면, 곧장 그것을 먹으려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아무리 나아가도 먹지 못한다면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반대로 창고 안에 홍당무를 가득히 넣어두고 당나귀를 들여보내면, 당나귀는 그 안에 있는 홍당무를 마음대로 먹겠지만 얼마 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지 않게 된다. 목표라는 것은 지향 활동을 자극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선에서 목표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목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반 공동체는 복음 7단계만을 강조하여, 마치도 공동체 모임이 7단계로만 고정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반 공동체가 함께 해야 할 일, 즉 새로 도전해야 할 목표를 세워야 한다. 기초공동체인 반 공동체가 자신들의 기대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갈망을 표출한 다음 목표를 세우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 갈 때 공동체는 성장하게 된다.

 

 

3. 공동체를 위한 내가 되자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나를 위한 공동체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나로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죽음과 부활의 빠스카 운동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란 한 지붕 밑에 모여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세계라는 어둠에서 타인 중심의 빛으로 바뀌어야 한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립 2,3)라는 말씀처럼 이기심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 사람이 죽고나서도 30분이 지나야 이기심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정말 죽어서도 맨 마지막까지 남아 떠나지 못한다는 이기심을 버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위하여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편안함을 버리는 결단이 필요했던 것처럼, 정말 송두리째 끊어 버려야 한다.

 

형제애는 희생을 요구하고, 정화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회심을 요구한다. 또한 사랑을 배우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좌절하지 않도록 성령께 간구하여 공동체를 위한 내가 되도록 기도하자. 공동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소속감 안에서 목표를 세우고, 공동체를 위한 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월간 빛, 2002년 8월호, 정리 이용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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