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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이야기4: 순교자 이유일(안토니오, 1819-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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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10 ㅣ No.2137

[순교자들의 이야기] (4) 순교자 이유일(안토니오, 1819-1868)

 

 

이유일(안토니오)은 홍봉주(토마스)와 김면호(토마스)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김정갑(바르나바), 민유배(아우구스티노) 등에게 서적을 빌려주고 교리를 가르쳤다. 1859~1860년에 양근에서 서울로 이사 온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손자인 권복(프란치스코)을 서너 차례 찾아가 『칠극』을 빌려주었으며, 자신의 집에 있는 베르뇌 주교를 만나게 해 주었다. 1859~1860년에 남종삼(요한)을 알아 서로 왕래하였고, 1860~1861년 상동(尙洞), 1863~1864년에 (소)공동 홍전문(紅箭門) 근처에서 살 때에 베르뇌, 다블뤼 주교와 남종삼을 만나게 하였다. 남종삼에게 『진도자증』을 빌려주었는데, 남종삼은 “천주교를 이유일에게 배웠으며, 바른 도리로 알게 되었습니다. 감히 천주교를 버리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교회지도자들은 1865년 말부터 두만강 근처에 자주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통하여 영불(英佛)의 힘을 빌리자는 방아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하였다. 홍봉주가 남종삼과 협의하여 건의했을 때는 대원군이 긍정적인 답변을 하였다. 이에 이유일은 평양에 있던 베르뇌 주교를 모셔오도록 김민호(토마스)에게 50냥을 주었고, 그해 1월 25일(양) 내포에 있던 다블뤼 주교를 모셔왔다. 그런데 대원군이 2월말 갑자기 박해를 일으켰다. 이에 겁이 나 서울을 떠나 강릉 계골(계촌) 심능석(스테파노)의 집으로 피신하여 머무르다가 1868년에 체포되었다. “서울 가서 포청에 며칠 갇혀있더니 하루는 바깥으로 나가더니 감투 쓰고 두루마기 입고 들어와 모양이 심히 수상한 지라. 한가지로 갇혀있는 심(능석) 스테파노 경계하여 말하되 ‘이런 좋은 때를 만나 기회를 놓치랴고 저런 모양으로 하느냐’ 하니, 안토니오가 그 말을 듣고 즉시 회두하여 다시 포청에 나가지 아니하고 심 스테파노와 한 가지로 치명하였습니다.”(『병인치명사적』 권 23, pp.118-119).

 

여기서 그가 살던 강릉군 대화면 계골(계촌)은 오늘날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이다. 1906년에 평창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여러 마을을 병합하여 계촌리라 하였다. 1868년 초에 박해의 손길은 점점 홍천, 원주, 횡성 등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해 2월 박 마르타가 홍천에서, 4월 박 요셉 등이 횡성에서, 5월 이유일과 심능석이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이유일은 1866년 박해를 당하여 교회 공동체가 무너지고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할 때, 박해로 무너지는 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잔혹한 고문과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두려움과 선교사와 신자들이 보여준 용감한 순교에 함께해야 한다는 사명감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과 인간적인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결국 두려운 마음이 들어 서울에서 지방으로 피신하였고, 심능석의 집에 머물렀다. 다른 하나는 포도청에서 가혹한 심문을 받으면서 유감을 입어 마음이 흔들렸다. 다행히 자신을 받아들여 주고 옆에서 순교를 권고해 준 심능석(스테파노)이 있었기에 회개하였고, 결국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22년 10월 9일(다해) 연중 제28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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