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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이야기5: 심능석(스테파노, 1819-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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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17 ㅣ No.2140

[순교자들의 이야기] (5) 심능석(스테파노, 1819-1868)

 

 

(1) 『좌포도청등록』(左捕盜廳瞻錄) (무진년(1868) 5월 11일, 심능석. 年 50, 스테파노). “심능석 저는 본래 횡성 태생으로 을사년(1845)에 용인 산의실(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에 거처를 잠시 옮겨 자리를 잡았습니다. 성교는 무술년(1838) 광주(廣州)에서 이미 죽은 박성고(朴性皐)에게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그곳에서 서양인 정(샤스탕) 신부를 내 집에서 만나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그 후 또 서양인 고(페레올) 주교를 내 집에서 만나 견진을 받았으며, 그 후 강(칼레) 신부, 김(Dorie) 신부, 장(베르뇌) 주교를 여러 곳에서 만나 간간이 고해를 하였습니다. 임술년(1862)에 강릉 계촌으로 거처를 잠시 옮겨 살다가 이제 잡히었는데, 어찌 죄가 없다고 변명하겠습니까? 배교할 수 없습니다. 교우들은 재작년(1866) 봄 옥사에 위풍에 겁이 나서 살고자 도피했으니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2) 『병인치명사적』(丙寅致命事績), “심 스테파노라 하는 이는 강원도 강릉 굴아위 지방에 살다가 무진년(1868)을 당하여 나이 49세라. 5월 초 5일에 본동 외인 친구들이 정자에 모여 청좌(廳坐)하매, 이(유일) 안토니(오)로 더불어 노는 중에 참여하였더니 뜻밖에 경포교 앞잡이로 다니는 놈이 여러 교졸 데리고 와서 ‘저 사람이 안토니라’ 한즉 포교 물으되 ‘안토니 (집)주인이 누구시냐’하니, (심능석) 스테파노가 나서며 ‘내가 주인이라’ 하니, 교졸이 일시에 달려들어 결박하려 한즉 스테파노 말하되 ‘우리는 결박하지 아니하여도 도망할 사람이 아닌즉 내 집으로 들어가야 남에게 진 빚과 상관되는 일을 처결한 후 적몰하라’ 하고 집에 돌아와 말하던 일을 채주(債主)에게 보환(報還)한 후 가산을 적몰하여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포청에 가서 갇히었다가 하루는 유직(有職)의 말이 스테파노는 ‘오늘 밤에 죽을 것이니 옷을 바꿔 입자’ 하니, 또한 희희낙락 웃음으로 지나니 활발한 거동이 옥중에 초월하더니 과연 그 날 치사하니라.”

 

심능석과 이유일이 살던 마을이 관변기록에는 강릉 ‘계촌’(李村)으로, 교회 기록에는 강릉 ‘굴아위’와 ‘계골’, 강릉 ‘영서 계골’이라고 하였다. 굴아위는 촌락 명칭이고, 계촌은 리(里) 명칭이다. ‘강릉 영서 계골’은 오늘날 평창군 방림면 계촌 3리 굴아우 마을이다. 심능석은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내려 온 이유일을 이로 인해 자신이 불이익을 받게 된다 할지라도 이를 감수하겠다고 결심하며 그를 받아주었고 끝까지 보호해 주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자신이 그의 집주인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던 것이다. 체포되어 끌려가기 직전에 주위 사람들에게 빚진 것을 모두 갚았으며, 순교 직전 입고 있는 옷을 달라는 이에게 가진 것의 전부인 옷을 벗어주고 그의 허름한 옷과 바꾸어 입었다. 또한 옥에서 유혹을 당하여 마음이 흔들린 이유일에게 순교를 권고하여 회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순교 직전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웃음이 가득하였다.

 

[2022년 10월 16일(다해) 연중 제29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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