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6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강론자료

연중 19 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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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욱 [EliaPark] 쪽지 캡슐

1999-08-08 ㅣ No.141

연중 제19주일(가해)

                                                                  1999. 8. 8.(수색)

. 제1독서 : 1열왕기19,9a. 11-13a./ . 제2독서 : 로마서9,1-5./ . 복음 : 마태오14,22-33.

 

'고객을 만족시키는 단계를 넘어서,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이 말은 우리 나라의 대기업 중 하나인 모 기업이 내세우는 고객 서비스 목표입니다. 이른바 '고객만족'에 그치지 않고, '고객감동'을 창출해 낸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만족의 단계이고, 어떤 것이 감동의 단계이겠습니까? 우선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만족'은 '마음에 부족함이 없이 흐뭇하고 충분하다고 느끼는 상태'라고 되어있고, '감동'은 '깊이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국어사전에 나온 대로 해석해 본다면, 이 기업은 자신들을 찾는 고객, 즉 손님들이 단지 마음에 부족함이 없이 흐뭇하고 충분하다고 느끼는 '만족'의 상태를 넘어서서, 자신들의 서비스에 깊이 느껴서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감동'적인 서비스를 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정확한 의미를 얼마 전 라디오를 듣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 라디오 프로그램에는 바로 이 '고객감동'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의 설명이 이랬습니다.

 

"... 사람들은 누구나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 욕구를 채워 줄 무언가를 찾는다. 사람들의 이러한 욕구만을 채워주는 것은 바로 '만족'의 단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욕구 외에, 자신도 모르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자신도 모르는 욕구를 깨닫게 하고, 그 욕구마저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내세우는 '고객감동'의 단계이다. ... "

 

무슨 말인지 굉장히 어렵게 들리지만, 쉽게 다시 설명한다면 이런 말입니다. 예를 들어, 목이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물을 찾아 헤맬 것입니다. 이 때 그 사람에게 물을 줍니다. 이로써, 그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풍족하게 채울 수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그 사람의 욕구를 풍족하게 채워주는 것이 '고객을 만족시키는 서비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마른 사람의 숨겨진 욕구를 알아내서, 목마른 사람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것을 제공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 목마름을 해소해줄 수 있는 물인데, 맛있는 물, 향기가 좋은 물, 즉 쥬스라든가, 청량음료라든가..., 목마른 사람이 당장의 목마름 때문에 미처 몰랐던 욕구를 생각나게 만들어서 그것까지도 채워준다면, 그 사람은 바로 이러한 서비스에 마음이 움직이는 감동을 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고객을 감동시키는 서비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고객감동'이라는 그들의 서비스 목표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들의 상업적인 계산이 숨겨져 있습니다. '만족'에서 '감동'으로 넘어가려면, 고객, 즉 손님의 욕구를 자꾸 부추겨야하고 그때마다 상품의 가격은 점점 올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물로 만족하던 사람이, 점점 쥬스를 마시게 되고, 그 다음엔 또 다른 비싼 음료를, 그럴듯하고 멋있는 비싼 잔에 담아주어야만 만족하며 마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만족을 시키지 않고, 한 차원 높은 감동을 시키겠다는 그들의 목표는, 어떻게 보면 순전히 자기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감동하는 서비스가 나중에는 단지 만족에만 그칠 것이고, 그 때마다 그들은 손님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지금 것보다 더한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반복되다보면, 사람들은 언제나 최고의 것으로 감동 받기 위해 더 많은 돈을 그들에게 지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업의 장삿속으로 계산된 '만족'과 '감동'의 개념 말고, 그 말 자체로만 본다면, 정말 너무도 감동적인 것 같습니다. 고객이 단순히 욕구를 채우는 '만족'하는 단계를 넘어서, 감동할 수 있도록 서비스, 즉 봉사를 한다. 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목표입니까.

우리는 실제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 욕구를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구를 풍족하게 채우는 '만족'을 했다고, 우리의 삶이 행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 철학자가,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했던 것처럼, 인간은 단순히 욕구가 충족되는 '만족'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감동'을 해야 진정 행복한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동물적인 욕구에 만족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인간다운 감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 항상 베푸시어 우리를 감동시키시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장삿속으로 계산된 인간의 욕구를 부추기는 '고객감동'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깨닫게 하시는, 모든 인간을 감동시키시고, 그 감동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이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유령으로 잘못 보고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따로 떨어져서 배를 타고 가다가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절대절명의 상황...,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이때, 물위를 걸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다가오시는 예수님..., 그들은 예수님을 보며, 유령이라고 소리치며 무서워합니다. 너무도 힘겹고 절망스러워 당장의 어려움을 모면해 보려는 욕구만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그들에게, 그들의 그러한 욕구만을 만족시키기 보다, 오히려 당신이 함께 하시는 감동을 주시려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 너무 과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과분하게, 당장의 욕구만을 만족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항상 우리가 감동하도록 항상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인간의 계산과 논리와는 전혀 맞지 않게 다가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처음에는 잘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곧 우리는 그분이 나의 모든 어려움과 욕구뿐만이 아니라, 나의 텅빈 가슴을 채울 감동을 주시는 분...,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힘겨움에 묶이지 않고 내가 올바른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분께서 우리 앞에 당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자신도 예수님처럼 모든 세상 걱정으로부터 초연해 질 수 있도록, 풍랑치는 물위를 걸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도 당신처럼, 당신과 하나된 사랑으로 세상 걱정에 초연해 질 수 있도록 물위를 걷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조금 걷다가, 다시 세상의 어려움과 힘겨움에 한눈을 팔고..., 그래서 물속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의 모습에 안타까우시면서도, 이런 우리들의 모습에도 우리를 향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감동시키십니다. 약간의 책망의 말씀을 하시고는 베드로를 배 위로 데리고 올라가십니다. 그러자, 그 때 풍랑이 멈추어 그들의 인간적인 욕구가 만족되었음은 물론, 자신들의 끊임없는 배신과 의심에도 절대로 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들은 감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힘겨움을 겪습니다. 그리고는 그 당장의 어려움과 힘겨움 때문에, 나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잊을 때가 많으며, 그 당장의 어려움과 힘겨움만을 극복해보려는 욕구를 만족시켜 보려고 혼자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려움과 힘겨움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제대로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설사 지금 당장은 그것들을 극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곧 또다시 어려움과 힘겨움은 계속 되풀이됩니다. 이렇게 이 세상의 어려움과 힘겨움에 묻혀 하느님조차도 생각 못하고 허덕일 때, 바로 그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인간이 계산하고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당신의 뜻에 맞게, 진정으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인간을 만족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될 어려움과 힘겨움 속에서도 당신과 하나로 일치된 기쁨, 당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을 행할 수 있도록 진정으로 감동될 수 있는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바로 당신의 사랑에 감동 받은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행할 때, 인간적인 욕구도 풍족히 채워지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시며 말입니다.

 

인간의 끊임없는 배신과 의심에도 인간을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인간들이 당신의 사랑에 반응이 없다고 결코 화내시지 않으십니다. 오직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서 항상 계시며, 그들에게 당장의 만족이 아니라, 사랑의 감동을 주십니다. 절처한 따돌림과 배신, 자신들의 욕심만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습으로 보여주시며,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 영원한 감동을 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감동을 우리의 삶 안에서 영원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랑을 행하시고 얻으신 당신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영광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베풀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베드로의 모습처럼 금방 또다시 세상의 힘겨움과 어려움, 나의 인간적인 욕심에 빠져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지 못하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포기한 적은 없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수해가 나고, 굶어죽는 같은 민족이 있어도, 우리의 눈에는 내 한 몸 먹고사는 거센 바람만 보게 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그러한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욕구만을 만족시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온전히 감동하고 그 사랑을 행할 때, 나의 그 모든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19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청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가 만족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를 감동시키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족'이 아니라, '감동'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감사하며, 우리도 이웃에게 '만족'이 아니라, '감동'으로 다가가는 사랑을 행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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