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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66: 페레올 주교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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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18 ㅣ No.2142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66) 페레올 주교 선종


조선인 사제 양성 힘쓰며 14년간 헌신한 페레올 주교, 하늘나라로

 

 

미리내성지 김대건 성인 경당 앞에 있는 페레올 주교의 묘.

 

 

조선 교회의 별이 지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장 조제프 장 밥티스트 페레올(Jean Joseph Jean Baptiste Ferreol, 1808~1853) 주교가 선종했다. 1853년 2월 3일 밤 10시께 서울 주교관에서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페레올 주교는 1852년 3월 말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낸 직후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병에 걸려 고생을 했다. 누적된 피로가 원인이었다. 당시 조선 교회 성직자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신자들을 만나러 가야 할 곳이 많아서 눈과 얼음이 덮인 산들을 가로질러 매일같이 걸어 다녀야 했기에 오래지 않아 녹초가 됐다. 다블뤼 신부도 1852년 9월 이질에 걸려 고생을 했다. 최양업 신부조차 두 번의 사목 방문에 지쳐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해 8월 고군산도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메스트르 신부만이 그나마 건강했다. 당시 조선의 사제들에게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했다.

 

페레올 주교는 자신에게 곧 닥칠 죽음을 이렇게 암시했다. “백약이 무효합니다. 병은 나아졌다가 다시 악화하기를 반복하지만, 근본적으로 여전합니다. 저는 더는 완쾌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결말이 곧 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 주시고 저에게 베풀어 주신 도움을 이 상황에서도 베풀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다블뤼 신부가 페레올 주교를 대필해 1852년 9월 20일 서울에서 홍콩 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주교관으로 달려왔다. 그는 주교 곁에서 며칠간 간호하다 병세가 호전되는 것을 보고 교우촌 순방길에 올랐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병이 재발했다. 이번에는 다블뤼 신부가 주교에게 병자성사를 줬다. 그는 위급 시 곧장 주교에게 갈 수 있도록 서울 근교 교우촌에 머물렀다.

 

페레올 주교는 병석에서도 직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다블뤼 신부에게 대필을 부탁해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대표부에 여러 명의 조선인 신학생을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 보낼 것이라 보고했다. 그리고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자코모 필리포 프란소니 추기경에게 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후임 교구장을 빨리 뽑아줄 것을 청했다.

 

1853년 2월 사목 방문 중이던 다블뤼 신부는 황급히 자신을 만나러 온 페레올 주교의 복사로부터 “주교님께서 위중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교우촌 방문을 중단하고 서둘러 서울로 갔다. 1853년 2월 5일 그가 주교관에 도착했을 땐 이미 페레올 주교는 이틀 전에 선종한 뒤였다. 페레올 주교는 마지막 날숨 때까지 함께 조선 땅을 밟은 동료인 다블뤼 신부를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와 생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하느님 품에 안겼다.

 

페레올 주교의 장례 절차는 다블뤼 신부의 주도로 진행됐다. 다블뤼 신부는 2월 5일 밤 고인에게 제의를 입히고 주교관을 씌웠다. 자정 무렵 아무도 모르게 더 외진 교우 집으로 고인을 옮겼다. 이튿날 아침 장례 미사를 봉헌한 후 고인을 입관했다. 옻이 두껍게 칠해진 소나무 관에는 벨린나의 명의 주교이며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땅이 꽁꽁 얼어붙어 고인을 바로 매장할 수 없었다. 한 교우가 페레올 주교의 주검을 2개월 동안 맡아 지켰다. 페레올 주교는 4월 11일 한밤중에 다블뤼 신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매장했다. 생전 페레올 주교는 자신의 선임자인 앵베르 주교나 김대건 신부 옆에 묻히길 원했었다. 서울 삼성산에 있던 앵베르 주교의 무덤에는 접근이 어려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안성 미리내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안장했다.

 

안타깝게도 페레올 주교 선종과 관련한 최양업 신부의 글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최 신부가 사목 보고서 형식으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르그레즈와 신부와 홍콩 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 1852년도와 1853년도 서한이 유실됐기 때문이다. 아마도 1853년도 9~10월께 쓴 편지에 페레올 주교의 선종 소식을 알렸을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다.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의 선종과 관련한 내용은 1854년 11월 4일 동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 단 한 줄 남아 있다.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의 선종으로 우리가 실의에 빠져 슬퍼하고 있을 때 새 선교사 한 분이 입국해 우리한테 오시는 것을 볼 수 있게 돼 얼마나 기쁘고 큰 위안이 됐는지 모릅니다.”

 

 

페레올 주교가 남긴 것

 

페레올 주교는 1839년 4월 28일 조선 선교사로 선발된 후 1853년 2월 3일 선종 때까지 14년간 조선 교회를 위해 헌신한 선교사였다. 그중 만 10년을 제3대 조선대목구장 주교로 조선 교회를 이끌었다.

 

페레올 주교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조선인 성직자 양성의 결실을 거뒀을 뿐 아니라 그 기초를 놓기 위해 조선에 신학교를 설립한 공로다. 둘째,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작성해 이들의 시복시성 재판에 결정적 증거 자료를 남겼다. 셋째, 바다를 이용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한 점이다.

 

페레올 주교가 조선 신학생들의 신학 교육에 관여한 것은 최양업이 1842년 11~12월 중국 길림성 소팔가자 교우촌에 도착하면서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1844년 6월 2일 최양업ㆍ김대건에게 차부제품을, 그해 12월 10일께 부제품을 줬다. 이후 페레올 주교는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김대건 부제에게 사제품을 줬다. 조선인 성직자 양성의 첫 결실이었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 입국 이후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신학생들을 선발해 손골과 배티에서 교육하고, 대신학교 교육을 위해 말레이시아 페낭 국제 신학교로 유학을 보내고자 했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순교자들의 전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1846년 9월 22일 조선 신자들이 정리한 「기해일기」를 번역, 수정해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같은 해 11월 3일에는 페레올 자신이 직접 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대표부로 보냈다. 최양업은 부제 시절 페레올 주교의 요청에 따라 홍콩 대표부에 머물면서 프랑스 말로 쓴 페레올 주교의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페레올 주교의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행적록에는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순교자 82위의 약전이 정리돼 있다. 이 기록이 시복시성의 결정적 기초 자료가 돼 이들 중 79위가 성인품에 올랐다.

 

페레올 주교는 바닷길을 이용해 조선에 입국한 첫 번째 선교사다. 그는 다블뤼ㆍ김대건 신부와 함께 1845년 8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라파엘 호를 타고 출발해 그해 10월 12일 강경 황산포 인근에 상륙했다. 사실, 바닷길을 통한 조선 입국을 처음으로 구상한 이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였다. 페레올 주교 역시 1843년 초부터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만주 땅에 선교 전초 기지를 마련하고 중국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후 조선 배로 갈아타고 입국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바닷길 개척에 관심이 컸던 그는 1845년 배를 끌고 상해에 온 김대건 부제를 만나 그 배로 조선에 입국했다. 페레올 주교는 입국 후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에게 바닷길을 이용해 입국할 것을 권한다. 둘은 고군산도와 백령도 인근에서 두 차례나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신자들과 만나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메스트르 신부는 10년간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다 1852년 8월 29일 고군산도를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바다가 아닌 의주 변문으로 1848년 12월 말 입국했다.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해상 입국로 개척을 위해 황해도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돼 결국 순교했다. 이러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1853년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상해 일원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백령도 부근에서 조선 배로 갈아타고 입국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페레올 주교의 바닷길 조선 입국로 개척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나 결국에는 커다란 결실을 보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0월 1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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