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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교회사 공개대학2: 103위 성인의 시복시성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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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3-31 ㅣ No.605

한국교회사연구소 상반기 공개대학 특강 지상중계 (2) 103위 성인의 시복시성 과정

 

 

시성의 권한이 교황의 고유한 권한으로 이전된 것은 12세기 말부터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75년께 "교황의 승인 없이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공적으로 공경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며 교황의 배타적 시성 권한을 천명한 바 있다.

 

그 이전까지 교황은 로마 바깥에서 이뤄지는 시성에 대해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시성과 공경은 모두 관할 지역 주교에게 있었다.

 


1588년 예부성성 설립

 

시복시성에 관한 절차법은 1588년 교황 식스토 5세 교령 「영원하신 하느님의 무한한 은혜」에서부터 시작됐다. 교황은 이 문헌을 통해 시성을 준비하는 예부성성을 설립했다. 이 예부성성은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경신성사성과 시성성으로 분할됐다.

 

조현범 박사가 강의를 하고 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1634년 이미 공경하던 분들의 시복시성을 하는 특별 규정을 제정했고 시복시성이 확정되기 이전에 하느님의 종에게 공적 경배를 드리는 것을 금지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또 1642년 「성인들의 시복과 시성에서 지켜야 할 규정」을 발표하며 시복과 시성의 구별을 확정했다. 이때부터 복자와 성인이 나눠지게 된 것이다. 최초의 복자는 1665년 시복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다.

 

이후 베네딕토 14세는 교황 우르바노 8세 교령을 보완해 「하느님의 종의 시복과 복자의 시성에 대하여」를 발표하고 이후 200년 간 예부성성의 시복시성 절차 기준을 확립했다.

 

20세기 들어서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 이는 1969년 발표된 교황 바오로 6세의 자의교서 「더욱 찬연한 성덕」에 나타난다. 이 교서에 따르면 교황청 허락 이전에 교구장 주교가 준비하는 증거 수집 절차가 유일한 심리절차가 된다. 교황청이 증거에 관해 유효성만 따질 뿐 따로 조사를 하지 않게 됐다.

 

이 내용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령 「완덕의 천상 스승」(1983년)에 의해 확립됐는데 시복시성 심사 과정에서 지역 교구 재판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

 

 

관할 교구장이 시복시성 청원

 

시복시성은 교구에서의 절차 → 교황청에서의 절차 → 기적심사 → 시복 → 시성 순서로 진행된다.

 

1) 교구에서의 절차=조사수속(Processus Ordinarius)=예비심사=정보조사

 

- 시복시성 청원의 권한을 가지는 교구장은 시복시성 후보자가 사망한 지역의 관할 교구장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연고지의 다른 교구장도 가능하다.

 

- 교구장이 먼저 시복 심사 개최를 선포한 뒤 자료를 수집하고 평가할 적임자를 선정한다.

 

- 선정된 이들은 후보자들에 대한 성덕과 순교에 대해 조사한다.

 

- 교구장은 조사 진행과정과 시복시성 후보자의 생애 및 사건의 중요성 등을 적어서 시성성에 알리고 자문을 구한다.

 

- 시성성에서 계속 진행해도 좋다는 '장애 없음'이라는 판정을 내리면 교구장은 증인을 심문하고 자료를 심사하는 일에 착수한다. 또한 시복시성 후보자의 전구로 일어났다는 기적에 대해서도 조사를 진행한다.

 

- 모든 조사가 끝나면 조서들 사본 2부를 작성해 시성성에 제출한다.

 

2) 교황청에서의 절차=교황청 수속(Processus Apostolicus)

 

- 지역 교구장에게 모든 문서를 접수한 시성성은 우선 주교에 의해 진행된 조사가 합법적이며 유효한지 심사한다.

 

- 긍정적으로 평가되면 보고관(relator)에게 맡겨 본격적 조사를 시작한다.

 

- 조사가 끝나면 조사 결과를 추기경 및 관계 주교회의에 이관한다. 이 회의는 전예비회의, 예비회의, 본회의 등 3회에 걸쳐 진행된다.

 

- 교황은 본회의에 참석해 모든 조사를 인정하는 칙서를 발표하고 칙서 발표 이후에는 기적에 대한 심사가 이뤄진다.

 

3) 기적심사

 

- 기적심사는 하느님께서 그 기적을 참으로 행하신 것인지, 그 기적이 실제로 후보자의 전구로 일어난 것인지를 검토한다.

 

- 신학적, 법적, 역사적, 과학적, 의학적 조사를 거치며 엄격히 진행된다. 반대자들 의견도 청취한다.

 

- 일반적으로 시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이상 기적이 있어야 한다. 순교자의 경우에는 기적이 모두 관면된다.

 

4) 시복

 

- 기적심사 결론이 긍정적이면 시복을 하게 된다.

 

- 교황이 주재하는 추기경 및 관계 주교 회의(어전회의, 투토회의)를 거쳐 교황은 교령을 작성하고 시복행사가 거행될 날짜를 정한다.

 

- 시복식은 교황이 시복 후보자에게 복자 칭호 내림 → 공적 공경을 허락하는 교서 선포 → 초상화 제막식 → 감사기도 → 교황 미사 순서로 이뤄진다.

 

5) 시성

 

- 시복이 거행된 다음 복자의 전구로 새로운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접수되면 시성을 위한 새로운 절차가 시작된다. 이때에는 기적에 대한 심의만 진행된다.

 

- 이때에도 두 가지 이상 기적이 인정돼야 한다. 그 기적이 증명되면 교황은 어전회의를 거쳐 시성을 결정한다.

 

- 시성식은 성인이 될 복자의 초상화를 앞세운 행렬 → 복자를 시성할 것을 간청하는 청원 → 성령께서 임하도록 기도 → 시성 교서 낭독 → 감사기도 → 교황 미사 집전으로 이뤄진다.

 

1980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준비위원회는 103위 복자시성식 추진을 200주년 기념 핵심사업으로 입안하고 1982년 5월 한국 주교회의는 기적관면을 시성성에 요청했다. 사진은 103인 성인화.

 

 

200돌 기념행사로 교황 방한

 

한국교회 103위 성인의 시복시성과정은 기해 및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 103위 성인 시성으로 나뉜다.

 

1) 기해 및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

 

- 교구 절차 : 1847년 82위 순교자들의 행적이 담긴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에 의해 라틴어로 완성된다. 이는 파리로 보내져 파리외방전교회 루케 주교가 1847년 10월 교황청 예부성성에 제출한다.

 

- 교황청 절차 : 1879년 예부성성은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수속에 장애 없음을 선포한다. 1921년 추기경 회의가 열리고 시복 후보자 82위 가운데 3위는 증거 불충분으로 제외된다.

 

- 시복 : 1925년 5월 교황청 주재 어전회의에서 기적 심사 면제령과 함께 79위 시복이 확정됐고 7월 4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식이 거행됐다.

 

2)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

 

- 교구 절차 :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수속은 교구 재판 형식으로 진행됐다. 총 135회에 걸친 재판 끝에 1901년 순교자 29위 행적을 담은 「병인 순교자 시복조사 수속록」을 예부성성에 제출한다.

 

- 교황청 절차 : 1919년 7월 예부성성은 교황청 수속을 위한 교회 재판을 서울대목구에 위임한다. 이때 증거 불충분한 3위가 하느님의 종에서 탈락된다. 이 재판기록은 1926년 교황청으로 보내졌고 1952년 3월 그 유효성을 인정받았다.

 

- 시복 : 한국 주교단은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해 교황 알현 자리에서 병인박해 100주년이 되는 1966년에 하느님의 종 26위가 시복될 수 있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1964년 파리외방전교회가 하느님의 종인 프르티에 신부 시복 청원을 말소해 달라고 요청했고 1965년에는 예부성성에서 프티니콜라 신부가 시복에 장애가 있음을 밝혀냈다.

 

결국 1967년 열린 전예비회의에서 하느님의 종은 24위로 줄어들었다. 1968년 2월 본회의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24위 순교 사실을 인정하고 4월 어전회의에서 기적 심사 면제령을 반포했다.

 

같은해 10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거행됐다.

 

3) 순교복자 103위 시성

 

1980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준비위원회는 시성 추진을 200주년 기념 핵심사업으로 입안한다. 1982년 5월 한국 주교회의는 '기적 관면'을 시성성에 요청하지만 시성성은 기적이 있어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와 시성식이 불투명해지게 됐다.

 

그러나 200주년 기념 행사로 교황 방한을 추진하면서 이때 시성식이 이뤄지길 희망한다고 교황청에 건의한다. 한국 주교단은 1983년 다시 한 번 '기적 관면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기적 심사 관면을 허락해 비로소 시성식이 거행될 수 있었다.

 

[평화신문, 2009년 3월 29일, 조현범 박사, 정리=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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