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 사제와 강론: 악마가 내 팔짱 끼었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1-08 ㅣ No.492

[사제의 해] “악마가 내 팔짱 끼었네!” - 사제와 강론

 

 

강론 - 하느님을 드러내는 엄청난 일

 

“신부님, 오늘 아침미사 때 강론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저를 위해 따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신부님 강론이 제게 정말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기쁘게 살겠습니다.” 본당에서 사목하던 시절, 주일미사를 마치고 성당 마당에서 미사에 참례하신 분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어떤 교우로부터 이런 식의 찬사를 들을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런 날은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손오공처럼 괜스레 신이 나서 하루 종일 호탕하게 웃어대고, 같이 살던 보좌신부와 신학생들 그리고 수녀님들 앞에서 마치 만사를 해결해 주고 마음도 넓은 근사한 목자인 척 너스레를 떨며 나도 모르게 으스댔던 기억이 있다. 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본시 강론(라틴어: Homilia, 영어: Homily)이란 “사람과 소통하거나 친교를 맺는다.”는 뜻의 그리스어 호밀레인(homilein)에 그 어원을 두고 있고,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강론을 전례의 한 부분으로서 전례주년의 흐름을 따라 하느님의 말씀을 일상생활에 결부해서 해설해 주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사제교령, 제4항 참조).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제품 이상의 성품을 받은 사람만이 강론을 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교회법 제767조 참조), 따지고 보면 성직자들의 미사전례 중의 강론은 당신 백성과 소통하시는 하느님께서 드러나시게 하는 엄청난 일인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이 맺는 친교가 실제로 이뤄지게 하는 도구 노릇을 하는 셈이다.

 

 

강론자의 핵심적인 어려움은?

 

사실 강론 준비를 제대로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씩 그 부담이 심해서, “어쩌다가 팔자가 꼬여서 신부가 되었나?” 하며 스스로 신세를 한탄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내가 신부가 된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자유로운 응답이었음을 상기하면서 마음을 추스를라치면, 결혼 초기에 천주교를 믿어서 나까지 유아세례를 받게 했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엔 내가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을 먹게 만든 가정환경을 조성한 주인공인 부모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내가 유치원생 시절 “바오로, 너같이 장난이 심한 아이는 신부님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어!” 하며 어린 마음에 오기가 생기게 한 수녀님이 떠오르기도 한다.

 

강론 준비를 부담스레 느끼게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 가장 핵심적인 어려움은 “이번 강론에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신자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감지해 내는 것이 도무지 쉽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장가도 못간 총각 주제에 혼인미사 주례 강론을 할 때나, 살아있었을 때 얼굴조차 몰랐던 분의 장례미사 강론을 할 때, 수도자나 군인, 경찰, 교수, 수감자들과 같은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그들의 속사정을 잘 모르면서 강론을 할 때와 같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소임을 받아 사목하고 있는 공동체와 함께 드리는 미사에서조차 ‘선심 쓴답시고 배고픈 사람 입에다가 소화제를 잔뜩 먹이면서 뿌듯해하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를 할까봐 두려운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거룩한 두려움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필요한 것이고 어떻게 보면 거룩한 것이다. 왜냐하면 강론 준비를 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고민을 할 때 반드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몸소 도와주실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강론자는 그분과의 친교를 체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려 할 때는 여지없이 악마의 유혹이 끼어드는 것 같다. 성경말씀대로 악마의 유혹은 참으로 여러 가지이고, 혹시 이번에 안 넘어가면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루카 4,13 참조)이 사실인가보다.

 

내 경험을 고백하자면, 사제생활 경륜이 좀 쌓였다고 무성의하게 강론에 임할 때, 내 머릿속에 온갖 합리화의 구실을 동원해 주는 근면한(?) 악마의 달콤한 목소리는 참으로 개근상 감이다. 그리고 자신감과 뻔뻔함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다. 더욱 교묘한 것은 강론시간에 내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하는 데 주력하면서도, 그것을 신자들을 위한 불타는 소명의식의 실천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 경우 아무리 좋은 얘기라도 신자들에게 끼치는 피해는 생각보다 매우 클 것이다. 강론자는 청중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만나게 해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하느님을 가로막고 나를 만나게 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누군가가 내 강론을 두고 칭찬이라도 하면 그런 찬사를 듣는 즉시 악마는 내 팔짱을 끼고 매달린 채 하루 종일 붙어 다닌다. 그런 날은 하느님을 드러내기보다는 자꾸만 나를 드러내고야 말았던 기억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유혹은 극복 가능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친히 유혹을 받으셨기에 유혹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기(히브 2,18 참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두려움도 필요하지만 그 두려움이 사적인 체면 때문이라면 오히려 은총에 의존하는 영적 배짱이 보탬이 된다는 것은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일 게다. 주님께 의탁하면서 자신을 비우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강론은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잘해야 제대로 준비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느님과 나의 은밀한 로맨스

 

공자가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던가? 자타가 공인하듯이 나는 아직도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하늘의 명령이나 보편적인 가치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도 하느님과 나만의 은밀한 로맨스는 즐긴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이 인격신(人格神)이신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마다 그리고 개별공동체마다 아주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관계를 구체적으로 맺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례는 사람과 하느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명백한 현장일진대, 전례의 한 부분이요, 여타의 강의나 교육적 설교와 구분되는 강론이 너무 공허한 이론이나 해설에 치우치면 그 본성과 기능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지향하며 일상생활에 기여하는 살아있는 강론을 하려면 강론자는 인간의 역사에 대한 지식, 시사성 있는 현황 파악력, 신학적 식견, 연설구사 능력, 문화적 감수성 등 다양한 요소들을 개발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어떻게 만나셨는지를 깨닫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 여러 가지 실례들이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만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신 적도 많지만 때로는 의사전달이 잘 안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만남 전체에 공통되는 주님의 일관된 모습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언제나 깊은 사랑으로 성심성의껏 대하셨고, 종종 그들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그들의 개별적인 속사정을 꿰뚫고 계셨다는 것이다.

 

 

하느님 친히 등장하시는 자리

 

교회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스승들이 강조했듯이, 신자들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강론을 하려면 강론하는 사목자 자신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유지해야 한다. 그분과의 친교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나도 지니려고 애써 노력해야(필리 2,5 참조), 청중에게 주님께서 이루시려는 바를 부족하나마 깨닫게 되고 청중의 속사정도 구체적으로 감지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시간과 장소와 대상에 따라 그에 걸맞은 매우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강론을 하게 된다.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유지한다는 것은 평소에 사람들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인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소중히 대하면서 인간이 지니는 목마름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궁금해하는 까다로운 질문들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들여다보면서 더 나은 답을 찾아 전달하는 방도를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나를 향해 쓰시는 마음을 몸소 체험하는 것은 그 바탕이다. 그럼으로써 강론자는 개인적 체면이나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영적인 당당함을 지닌 채 그리스도의 직관력으로 하느님 백성을 어루만지게 될 것이고, 강론대에 하느님께서 친히 등장하시게 할 것이다. 그리고 강론에 대한 신자들의 찬사는 이제 강론자가 아닌 하느님께 향한 찬송이 될 것이다.

 

[경향잡지, 2009년 12월호, 이경상 바오로 신부(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 서울 성모병원 원목사제)]



1,52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