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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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33-34: 상호경청과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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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3-05 ㅣ No.799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33) 상호경청과 대화 1

 

 

시노드적 태도의 중심에는 ‘상호경청과 대화’가 자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 세계주교시노드 개막미사 강론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어봅시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듣는 일에 익숙한가? 우리 마음을 듣는 것은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표현하도록 허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마음에 방음장치를 하지 말자.”

 

여기에서 시노드적 경청은 단순한 여론의 조합이나 건의의 수렴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사람들의 경험 안에서, 사건들 안에서, 거룩한 교역자들의 직무 수행 안에서, 그리고 시대의 징표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소리’를 하느님 백성 전체가, ‘저마다’, ‘함께’, 그리고 ‘서로’ 듣는 가운데 도달하게 되는 결과이며, 인간적 논리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령께 대한 공동의 순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동의를 찾는 것입니다. 시노드적 교회의 경청과 대화의 목적은 “언제나 진리나 교회의 선익을 추구하는 것”이며,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회의 합의(consensus ecclesiae)는 투표 집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의 유일한 영혼인 성령께서 활동하신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목자의 경청뿐만 아니라, 평신도들 사이에 이루어져야 하는 경청도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대화의 문화를 장려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실제로 ‘한국교회 시노드 종합의견서 2항’에서는 “본당에서 신자들 대부분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데 소극적인 경향이 크고 대화를 피한다. 본당 주임 사제 앞에서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뒤에서 여론을 형성할 때가 많다. 성직자나 수도자, 또는 단체 대표들의 의견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거나 편중된 자세를 가지고 있다.”라고 현실을 지적하였습니다. ‘권위주의적이고 지배하려는 형태의 리더십은 성직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들도 그러한 특성을 드러낸다.’(아시아 대륙회의 최종문서)는 지적도 존재합니다.

 

경청의 결여는 단순히 물리적 혹은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측면으로 다양한 의견 수집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실존 자체를 보지 못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청년과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등 우리 주위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통상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만이 존재 의식을 갖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교회는 시노달리타스와는 매우 거리가 멉니다. [2024년 3월 3일(나해) 사순 제3주일 춘천주보 4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34) 상호경청과 대화 2

 

 

그러면 시노드적 대화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까요? 국제신학위원회의 문헌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다른 이들을 능가하거나 반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또 깊이 있게 들으면서 의견을 교환하는 것, 함께 생각하고 함께 일하려는 의도를 갖는 것, 그리고 대화 상대방에 대하여 공감과 존중과 신뢰를 가지는 것 등”(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110-114항 참조)입니다. 요컨대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을 위한 핵심 요소인 ‘상호 경청’은 곧 ‘상호 존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내는 단순히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든 공동체든 인간 역사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변화는 거의 없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을 분석해 보면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일련의 과정과 에너지의 축적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브 콩가르 추기경이 교회 개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에도 유효해 보입니다. “삶에 대한 모든 것은 유예를 갖고 있고 이것은 피할 수도 간과할 수도 없다. 시간과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 일만이 시간을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해서도, 교회 내 다른 구성원에 대해서도, 그리고 공동체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대화의 장(場)은 ‘여백과 기다림’이 형성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빨리빨리의 사회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진 우리는, 교회에서도 즉각적인 응답과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 의해 철저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여 그대로 ‘즉시’ 이루어진다면, 과연 하느님이 개입하시고 활동하시는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교회는 즉각적으로 효율적, 효과적인 결과는 내는 집단이 아닙니다. 때로는 더디더라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우리 공동체에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루카 1,29)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했던 성모 마리아의 태도가 신앙인의 자세이자, 시노드적 삶의 태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그리고 함께 ‘기다리며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2024년 3월 10일(나해) 사순 제4주일 춘천주보 4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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